울산시 북구 강동동은 신라 초에 율포현이라 하였다. 19대 눌지왕 때 충신 박제상이 일본에 볼모로 잡힌 미해왕자를 구출해 오려고 율포에서 떠났는데, 그 곳이 지금의 구류리항이다. 세조 원년(1455년)에 현재의 정자리에 목책을 설치하고, 5년 뒤 그 위에 돌 보루를 쌓아 경상좌도 병마절제사의 분병소를 두었는데 이 성을 유포석보라고 한다. 그 뒤에 이 이름을 따서 유포면 혹은 유등포라고도 했다.

 나말여초에 중앙권력의 이완을 틈타 세금의 수송납부를 거부하는 등 지방 각지의 호족(豪族)들은 신라의 지배체제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활동 근거지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후삼국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의 호족들은 성채를 중심으로 스스로 성주(城主), 군주(軍主) 또는 장군(將軍)이라 칭했으며, 그 일대에 마련된 농업생산 시설을 토대로 생산근거지를 구비하고 있었다. 울산지역의 경우, 이전부터 호족으로 성장해 온 울산 박씨 가문이 효공왕 5년(901) 무렵에 이 지역의 여타 호족을 아우르는 호족장으로서의 위세를 확립하게 된다.

 고려 태조 13년(930년) 9월, 호족 박윤웅이 명주(溟洲)로부터 흥례에 이르기까지 모두 110여 연해(沿海) 주(州) 군(郡) 부락의 성을 들어 고려에 귀속했다. 고려는 하곡(河曲) 동진(東津) 우풍(虞風)과 남쪽의 동안군을 합쳐 흥례부로 추인했고, 이는 오늘의 울산의 기틀이 됐다. 박윤웅은 숭록대부 대장군(崇錄大夫大將軍)의 벼슬을 받았고 고려 창건 2등 벽상(壁上)공신에 봉해졌다. 이와 함께 식읍(食邑) 500호에다 흥려백의 훈작과 함께 유포(柳浦)의 곽암과 농소(農所)의 채지는 물론, 구류리의 판지마을 앞 해안가의 일명 윤웅바위·미역바위·양반바위로 불리는 유포지방 미역바위 12암을 받았다.

 그러나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울산 박씨들이 조상의 훈공을 믿고 권세를 제 마음대로 한다며 임금에게 아뢰어 이를 나라에 환납토록 했다. 그 후 미역바위는 3년 연속 흉작이 들자 어민들이 이 사실을 도호부사(都護府使)에게 호소했고 부사는 이를 경상감사(慶尙監司)에게 보고해 다시 한 바위를 도로 내주어, 그 바위에 박윤웅의 이름자를 새기게 했다. 이로 인해 지금도 그 미역바위는 수산업의 테두리 밖에서 특별한 예외로 울산 박씨 소유로 있으며, 전국 유일의 하사암으로 현재도 소작인은 미역 일부를 그 종가에 납부하고 있다. 읍지에는 바위 면에 "윤웅(允雄)"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다 하나 찾을 수는 없고, 다만 광복 후 바닷가에 비석을 세워 옛일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미역바위는 오랜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고려의 신흥 명문 박윤웅에게 부여된 지상권에 기초한 보상적 권리다. 이 지역은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인해 미역이 풍부했고 미역바위의 생산량은 월등했다 한다. 고려시대 백성들이 널리 먹었던 미역의 사회적 수요를 감안하면 지금의 미역채취권과는 달리 엄청난 경제적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후손 가운데 한 때 소유권을 남용한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박씨 종가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천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한 듯 해 신비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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