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은 때마침 돌출한 창씨개명 망언과 유사법제의 일본국회 통과라는 악재로 양국간 갈등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열렸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을 모았다. 무엇보다 고이즈미 총리는 주변국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한일관계를 긴장시키고, 과거사에 대해 "불투명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국내외 비판을 자초했던 인물이다. 이런 점 때문에 북핵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이 더 강경하게 나타나거나, 일본의 왜곡역사교과서 시정을 비롯한 과거사 문제가 불분명하게 넘어갈 가능성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양국 정상의 공동성명과 기자회견을 보면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대목이 눈에 띄지 않는다. 주요 현안인 북핵문제에 대해서는 관련국들이 외교·평화적 해결노력을 기울이고, 북한이 핵문제의 해결에 적극 나설 경우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지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등 기존의 양국 입장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 다른 분야에서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노력 등 산업·투자협력확대, 인적·문화적 교류 확대, 한국의 일본 대중문화개방 확대 등 예견됐던 수준의 언급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돌출현안으로서 한일 양국 모두의 관심이 쏠렸던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측 의견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실망을금할 수 없다.

 과거사와 관련한 공동성명 문안은 "한·일 양국이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 이를 토대로 21세기 미래지향적 양국관계 발전을 위해 함께 전진해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는 포괄적인 것 하나뿐이다. 노 대통령이 회담전에 말했던대로 과거사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되지만, 불분명한 역사인식이 똑같은 갈등을 되풀이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라는 애매모호한 대목은 최소한 "과거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고…"라는 식으로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양국 역사학자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역사공동연구위원회"활동의 중요성을 거듭 상기시키고 그 결과가 일본 역사교과서 편수 및 검정과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창씨개명 망언같은 발언이나 역사교과서 왜곡은 잊혀질만 하면 반복되는 연례행사가 돼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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