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복리는 울주군 웅촌면 9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는 오복(五福)과 대양(大陽)으로, 고종(1894년)때는 오복동(五卜洞)과 대양동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대양동의 대(大)와 오복동(五福洞)의 복(福)을 따서 대복리(大福里)가 되었다. 마을이름이 "오복"과 "대복"이니 참으로 복이 많은 마을이다. 주변지역 개발로 마을이 크게 확장되었고, 장백·한솔 아파트가 들어서 대복1리에서 대복5리까지 늘어났으며, 모두 6개 행정마을이 되었다.

 대양(大陽)이란 이름은 신라 때 이 마을의 태양사(太陽寺)라는 절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이 곳의 원(院)을 대양원(大洋院)이라 한 사실로 보아 "다물"과 관계된 이름으로 보인다.

"대(大)"는 옛 지명에서 "地" "對" 등과 같이 그 음을 "다"라 하였다. "양(洋)"은 새김이 "물(水)"이다. 양(洋)을 단지 물(水)로만 본다면 이 곳의 지세로 보아 그 이름과 연관시키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대양(大洋)을 다물계(多勿系) 지명이란 측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대양(大洋)과 다물(多勿)은 그 음과 뜻이 같기 때문이다.

 주몽(朱蒙)이 졸본부여(卒本夫餘)에서 나라를 세우고 먼저 복속시킨 나라가 비류수(沸流水) 상류의 비류국(沸流國)이었는데, 이 곳을 다물도(多勿都)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다물(多勿)을 복구토(復舊土) 즉, "구토의 회복"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살필 것은 백제계(百濟系)가 남하함에 따라 그들의 주거지에는 다물계(多勿系) 지명이 생겨나고. 이 계통의 지명이 서해안에서 남해를 지나 동부 경상도에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물계(多勿系) 지명은 두동면 구미리의 대밀(大密·多密)에도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복구토(復舊土)"라는 고구려 말은 귀화(歸化) 또는 정복이라는 뜻으로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대양"은 진한(辰韓) 계통의 정복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고, 이는 곧 웅촌지방이 일찍이 우시산국(于尸山國)이 있었던 것과 연관성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땅이름은 사람 이름보다 더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것이어서 부족이나 민족의 사회생활과 더불어 생성되고 역사적·문화적 환경의 요인에 따라 다르게 명명되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땅이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족이나 민족 대이동의 경로나 궤적을 좇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시산국을 정복한 이들이 고구려계를 원류로 한 백제계의 후손들이라면, 비록 농경사회를 이루어 정착하였다지만, 기마민족의 후예로서 머나 먼 남쪽 땅 어딘가에서 성을 쌓고 도시를 만들며 언젠가는 대륙을 향한 출우시산국(出于尸山國)을 꿈꾸며 지명마다 다물(복구토)의 흔적만을 남기며 몸부림 쳐왔던 것은 아닐까.

 오랜 세월 속에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복구의 옛 땅, 졸본부여에 대한 향수가 불현듯 되살아 난다. 조상의 얼과 뿌리에 대한 유기체적 생명의 전승을 느끼는 듯하여 새삼 역사를 재구성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면 너무 감상에 젖은 말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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