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大陽)이란 이름은 신라 때 이 마을의 태양사(太陽寺)라는 절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이 곳의 원(院)을 대양원(大洋院)이라 한 사실로 보아 "다물"과 관계된 이름으로 보인다.
"대(大)"는 옛 지명에서 "地" "對" 등과 같이 그 음을 "다"라 하였다. "양(洋)"은 새김이 "물(水)"이다. 양(洋)을 단지 물(水)로만 본다면 이 곳의 지세로 보아 그 이름과 연관시키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대양(大洋)을 다물계(多勿系) 지명이란 측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대양(大洋)과 다물(多勿)은 그 음과 뜻이 같기 때문이다.
주몽(朱蒙)이 졸본부여(卒本夫餘)에서 나라를 세우고 먼저 복속시킨 나라가 비류수(沸流水) 상류의 비류국(沸流國)이었는데, 이 곳을 다물도(多勿都)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다물(多勿)을 복구토(復舊土) 즉, "구토의 회복"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살필 것은 백제계(百濟系)가 남하함에 따라 그들의 주거지에는 다물계(多勿系) 지명이 생겨나고. 이 계통의 지명이 서해안에서 남해를 지나 동부 경상도에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물계(多勿系) 지명은 두동면 구미리의 대밀(大密·多密)에도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복구토(復舊土)"라는 고구려 말은 귀화(歸化) 또는 정복이라는 뜻으로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대양"은 진한(辰韓) 계통의 정복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고, 이는 곧 웅촌지방이 일찍이 우시산국(于尸山國)이 있었던 것과 연관성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땅이름은 사람 이름보다 더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것이어서 부족이나 민족의 사회생활과 더불어 생성되고 역사적·문화적 환경의 요인에 따라 다르게 명명되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땅이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족이나 민족 대이동의 경로나 궤적을 좇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시산국을 정복한 이들이 고구려계를 원류로 한 백제계의 후손들이라면, 비록 농경사회를 이루어 정착하였다지만, 기마민족의 후예로서 머나 먼 남쪽 땅 어딘가에서 성을 쌓고 도시를 만들며 언젠가는 대륙을 향한 출우시산국(出于尸山國)을 꿈꾸며 지명마다 다물(복구토)의 흔적만을 남기며 몸부림 쳐왔던 것은 아닐까.
오랜 세월 속에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복구의 옛 땅, 졸본부여에 대한 향수가 불현듯 되살아 난다. 조상의 얼과 뿌리에 대한 유기체적 생명의 전승을 느끼는 듯하여 새삼 역사를 재구성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면 너무 감상에 젖은 말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