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시작 강원도 고성까지 총연장 485.2㎞
울산 관통 웅촌~호계 구간은 37.2㎞ 1925년 완공
울산 최초 교량 삼호교는 한해 앞선 1924년 개통
시 승격전 인구 6만 농어촌 100만명 대도시 위용

□ 국도 7호선 시대
1. 울산읍과 7번국도
2. 일제의 잔영들
3. 울산의 부자들
4. 울산의 인텔리들
5. 옛샘터

울산시가 올 들어 울산공업센터 지정 5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울

▲ 500여년 전 울산구시가지의 중심지역으로 예상되는 울산읍성 내 관아 추정도. 울산대 김선범 교수 작성.
산이 오늘의 산업도시가 되기까지는 지금은 구시가지가 된 7번 국도 일원이 그 힘의 원천이 됐다. 7번 국도를 중심으로 하는 우정동, 성남동, 북정동, 옥교동, 학성동은 인물과 부(富)가 모여드는 집산지(集散地)의 역할을 했다. 그렇게 정치 1번지이자 울산 상업의 중심지였던 7호 국도 주변은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상권이 남구로 이동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 듯 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원도심 문화거리 조성 등에 힘입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울산 현대사의 출발점이자 울산의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던 중구의 ‘국도 7호선 시대’, 즉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그리고 1960~70년대의 국도 7호선 주변을 기획 시리즈를 통해 되돌아 본다. 본보는 이들 지역의 옛 모습과 일화, 비화 등을 ‘7번국도’ ‘사회’ ‘정치’ ‘문화’ 등 4개 부문으로 나누어 연재할 예정이다. 필자인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는 경상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는 등 지역 언론사에서 오랫 동안 근무한 언론인으로, 향토사 연구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울산은 1962년 공업도시로 승격되기 전까지만 해도 동해의 조용한 어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공업도시로 지정된 후 실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시 승격 전 7호선 국도로 이루어진 구시가지 인구는 2만여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울산을 시로 승격시키기 위해 하상면과 방어진읍, 대현면을 합하면서 갑자기 인구가 늘어나 6만여명이 되었다. 울산은 인구 면에서 50여년 만에 100만을 넘어선 대도시가 되었다.

◇울산읍성 도로 지금도 사용

지금은 구시가지로 불리는 울산읍이 언제부터 도시 형태를 갖추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조 성종 7년(1476)에 시작해 이듬해 완성되었고 성종 12년(1482)에 다시 개축된 울산읍성 때 도시 형태를 보면 요즘과 비슷해 이 무렵 이미 이 지역에 비슷한 도시 형태가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동안 도시가 많이 변했지만 읍성을 세울 때 만들어진 도로가 지금까지도 큰 변화 없이 여전히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당시 성내에는 동서로는 동문과 서문을 잇는 도로가 나 있었고, 남북으로는 객사가 있는 곳에서 남문까지 연결된 도로가 객사 앞에서 교차하는 T자형 도로망이었다. 당시 동문은 현 중앙동주민센터 인근에 있었고, 서문은 양사초등학교를 지나 빅세일마트 자리 인근에 있었다.

요즘 도로로 보면 동과 서로 잇는 도로는 현 울산초등학교 앞에서 동으로는 태화서원 뒤로 나아가 중앙동주민센터에서 올라오는 길이 마주치는 곳까지였다. 또 서로는 울산초등학교에서 양사초등학교 앞을 지나 빅세일마트 앞까지 연결되었다. 최근 들어 이 도로는 장충로가 되면서 확포장되어 도로 폭과 길이가 옛날과 다르다. 동서 도로에 비하면 남북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아직 옛 길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남북 도로는 현 울산초등학교에서 울산교까지 이어지는 도로로 남문은 구 주리원 백화점 앞에 있었다.

울산읍성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지금은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거리는 아직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아 옛 선조들이 다녔던 그 길 위로 요즘도 사람들이 걷고 있어 역사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富)의 이동통로 7번국도

7번 국도는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연결되고 총 연장이 485.2㎞이다. 이 중 울산지역은 웅촌 대대리부터 호계 지역의 울산과 경주 경계지점까지로, 총 연장 37.2㎞이다. 7번 국도는 옛날에는 지금의 울산대학 앞을 지나 삼호교로 들어와 태화고개를 넘어 태화사거리를 통해 시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우정삼거리에서 상업은행 앞을 거쳐 병영을 경유해 산전 앞 동천교를 넘어 경주로 갔고, 또 다른 한 갈래는 동천교를 넘어서면서 방어진과 정자방면으로 나갔다.

지역에 따라 건립 연도가 다르지만 울산의 경우 이 도로가 1922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925년에 완성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들어 울산 사람들이 7번 국도보다 더 많이 이용하는 학성로는 이보다 훨씬 뒤인 1940년에 만들어졌다.

이 외에도 구시가지 중심 도로를 보면 태화교 사거리에서 북부순환도로로 가다가 양사초등학교로 빠지는 ‘장충로’가 2011년 확포장되어 지금은 번영로까지 넓게 나 있고 북부순환도로 역시 1993년에 개통되었다. 또 태화교 사거리에서 태화강을 따라 학성공원으로 빠지는 강변도로는 1976년 개통되었다.

울산사람들은 구시가지 상권이 1980년대 이후 강남으로 넘어간 것이 순전히 이 지역의 교통 불편 때문이라고 말한다.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될 무렵 울산 초대시장으로 도시계획에 깊이 관여했던 홍승순씨는 나중에 자신의 실책 중 가장 컸던 것이 재임 중 구시가지를 관통하는 큰 길을 하나 내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구시가지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식 건물이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도시 대부분이 초라한 전원도시로 3층 건물이 간혹 있을 정도였다. 당시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았던 건축물이 성남동 소방서에 있었던 전망대였는데 이 전망대가 겨우 오늘날 3층 건물 높이 밖에 되지 않았다. 구시가지에 고층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울산 최초의 아파트로 알려진 복산맨션이 들어선 것도 이 무렵이다.

◇최초의 교량 삼호교

일제 강점기에는 태화강의 남과 북을 잇는 다리도 삼호교와 울산교, 동천교 등 3개뿐이었다.

삼호교 개통식은 1924년 5월28일 있었는데 조선일보는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태화강은 물결이 평소에도 험해 주민들이 강을 건너기 위해 고생이 많았는데, 김홍조씨가 다리 가설을 요청해 일본인 청부업자가 공사를 맡아 일을 했다. 그런데 공사 기간 중에도 홍수로 장비들이 물에 떠내려가는 등 어려움이 많아 공사기간이 무려 2년7개월이나 소요되었다. 그리고 이 다리를 준공할 때는 각지에서 6000여명의 사람들이 구경을 하기 위해 모였다’

놀라운 것은 삼호교 개통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숫자다. 오늘날처럼 교통이 좋지 않았던 당시 6000명의 구경꾼이 모였다는 것은 이 다리에 대한 군민들의 관심이 얼마나 컸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총 연장 230m, 폭 5m로 총 11만9000여원을 들여 건립했다는 이 다리는 건립 100여년이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 제자리에 있다.

현재 삼호에는 3개의 다리가 있다. 이 중 하나는 자유당 시대 때 건립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90년대에 세워졌다. 자유당 때 세워진 다리는 소위 ‘이용범 다리’로 인도가 없어 지금도 차량만 다니고 있다. 이용범은 자유당 시절 재정위원장을 지냈던 인물로 이병주씨의 작품 ‘산하’에도 등장한다. 자유당 시절 이씨는 선거 때가 되면 울산에 와 자유당 후보를 돕는 연설을 자주 했는데 이때 무식한 발언을 자주 해 울산군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 다리에 인도가 없는 것 역시 당초 설계도에는 인도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용범이 다리를 시공하면서 인도를 설치하지 않고 남은 돈을 정치 헌금으로 자유당 정권에 바쳤다는 얘기가 전해 오고 있다.

최초의 삼호교는 역사성 때문에 2004년에는 울산등록문화재 104호가 되었다.

동천교와 관련된 기사는 1924년 8월5일 동아일보에 실렸다.

‘경남 울산군 하상면 병영 동천교는 대정 4년(1915) 대홍수로 유실된 후 지금까지 교량을 가설치 않아 경주와 방어진으로 가는 교통이 불편했다. 따라서 최근 총독부 관계자가 현장에 가 지질 조사를 하고 있으며 공사는 예산이 없어 내년에 착수할 것이라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 동천교는 삼호교에 비해 1~2년 뒤 건립되었는데 경주와 방어진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 다리를 이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두 다리에 비하면 울산교는 10여년 후 건설된다. 울산교 기사는 1935년 9월11일 동아일보에서 볼 수 있다.

‘그 동안 울산군민이 갈망했던 울산교가 오랜 공사를 거쳐 이번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10여만원이 소요된 이 다리의 길이는 360m이고 폭은 6m이다. 울산군의 교통사정을 볼 때 이 다리 개통은 울산 교통을 호전시키고 다리 자체가 태화강을 아름답게 할 것이다…’

이 다리는 해방 후에는 태화강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울산읍에서 장생포로 가는 사람들은 이 다리를 많이 이용했다. 이 다리는 1960년대 울산이 공업도시로 승격된 후 태화강 남쪽이 공단으로 개발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게 되었다. 시간적으로는 이들 다리가 건립된 지 70~80여년 밖에 되지 않지만 그 동안 태화강과 동천강 위에는 수많은 다리들이 놓였다. 지금은 차량들이 다닐 수 있는 다리만 해도 20여개가 되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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