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지극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할 때 가끔 언어의 한계성에 고민한다. 이 보다 더 알맞은 단어의 궁핍함이 우리들 정서를 그 만큼에만 서게 한다.

 대학 때 지도교수님은 외국인(스페인)신부였는데 그는 강의 중 한번도 신(神)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거론한 적이 없었으나 우리 제자들은 차례대로 그 분에게서 영세 받기를 원했고 그 분의 제자 되기를 원했었다. 선생께선 학교 안의 사제관에서 생활 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안의 풀장에서 한 시간 동안 수영을 하고 성당에서 기도 한후 우리들을 맞았고 30분 이내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가능한 전차 타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만에 처음 휴강이어서 다들 좋아했는데 수업은 그대로 진행한다 해서 강의실로 갔더니 셀프카메라로 오늘의 강의 내용을 직접 찍어 두시고는 "후하하! 납니다. 놀랐지요? 자아! 수업 시작할까요?"하면서 유럽인의 익살스런 웃음으로 우리들의 기대를 한방에 날려 버리고 그 날의 강의는 시간표대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학과 파티가 있거나 할 경우에는 절대로 마지막까지 계시지 않고 중간쯤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끝까지 남아서 마지막까지의 당신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는 욕심 많은 성품 때문이다. 그 습관대로 선생님께선 우리들을 남겨두고 정년 5년 전 학교를 물러나 지금은 바티칸 교황청에서 사제직 일을 하고 있다.

 살면서 늘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고 더 이상 존경 할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지금의 나를 슬퍼하면서 로마행 차비를 모으고 있다. 우리는 그 분의 검소하고 성실하고 또한 뛰어난 학문의 경지와 너그로운 인품에서 카톨릭이라는 종교에 대한 친근감과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에 더 가까이 가고자 했었다. 선생님께선 씩씩하고 목소리 큰 나를 정의롭다고 여기셨는지 아니면 처음 만난 한국 유학생에 대한 기대가 크셨는지 나의 영세명을 쟌다르크(joan of arc)라고 지어 주셨다. 불교집안의 나는 그렇게 해서 카톨릭 신자가 되었고 나의 메일 주소는 joan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아직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을 구실로 이 나이까지 살고 있다.

 우리들은 굳이 언어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통할 수 있는 많은 오감을 가지고 있다. 이제 곧 월드컵 대회가 이 땅에서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에서 같이 열리게 된다. 우리들의 일본나라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다. 그들의 많은 장점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과거의 일로 그들을 절대로 용납하려 들지 않는 부분 또한 있다. 이런 우리들에 대해 그들은 당황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대로 그들은 왜곡된 교과서의 내용만 배웠고 한국과의 복잡한 과거관계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차원에서 해결해야 될 영역의 일들은 정부 관계자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들은 민간차원에서의 편안한 만남을 위한 준비를 해야 되겠다.

 어느 일본인 교수는 "관광객을 위해서 무언가를 준비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그것을 관광객들은 받아들이고 즐기면 된다 나는 한국의 시골식당에서 음식 위로 날아다니는 파리까지 좋다. 왜냐하면 김치가 맛있고 훈훈한 식당주인의 마음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또 어떤 일본인은 "한국이, 한국사람이 좋다. 거기엔 어떤 이유도 없다. 그냥 좋으니까. 그래서 나는 한국말을 배웠고 일본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에 왔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일본인들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무거운 얘기들은 그냥 두자. 우리가 겸손한 친절과 따뜻한 마음을 열어 두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의 과거사를 뉘우칠 것이고 한국에 대한 낙관적인 친근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월드컵 대비의 하드웨어적인 준비에 앞서 소프트웨어적인 준비가 아쉬운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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