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 중구 태화동. 울산이 시로 승격된 뒤 한참동안 군데군데 자연마을 단위로 인가가 있었을 뿐 들판과 구릉이 전부였던 이곳은 지금은 아파트와 주택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언덕받이에 들어선 고층 아파트들로 너울처럼 이어져 가던 산자락이 끊어져 간간히 그 형상만 보여주고 있다. 그린벨트라는 인위적 제한이 없었더라면 아마 오래전에 강언저리까지 집들이 점령했을 듯 싶다. 동부아파트 뒤 울산시 중구 태화동 산 36-6. 울산박씨가 관장하고 있는 흥례서원(興禮書院)이 산 허리에 자리잡고 명정들과 오산,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태화강을 굽어보고 있다. 그 옆으로는 수관재와 말응정, 재실과 정자가 하나로 합쳐져 있다. 도시화된 이 곳이 울산 박씨의 집성촌임을 그나마 알려주고 있다. 이곳 울산 박씨는 문중 전체 5분의 4를 차지하고 있는 말응파("應派)들이다.

 울산 박씨는 최근의 명칭이다. 그 이전에는 흥려 박씨(興麗 朴氏)로 불렸다. 흥려는 울산의 옛 지명이다. 오늘날 울산이 있게 한 이 지역 최초의 통합명칭임 셈이다.

 흥려는 울산 박씨의 시조인 흥려백 장무공 박윤웅(興麗伯 莊武公 朴允雄)에서 시작된다. 흥려(興麗)는 한자 뜻 그대로 려(麗)(고려를 뜻함)를 일어나게 한 곳이다. 신라 경명왕의 후손인 장무공은 신라 효공왕 5년(901년)에 지금의 학성(하곡현 신두산)에 정착, 신학성장군(神鶴城將軍)으로 지역을 통치했다. 호족장으로 소국왕의 역할을 담당했으나 고려에 귀부했다. 고려 태조가 개국시 보좌한 장무공을 개국공신 흥려백으로 삼고 동진, 동안, 우풍현을 합해 흥려부(興麗府)로 승격시켜 장무공에 사채지로 하사했다. 그 당시 사채지 일부가 미역바위로 불리는 북구 강동동 판지마을앞 곽암(藿巖)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태화동으로 자리를 옮긴 때는 임진왜란 이후로 대종회 재유사를 맡고 있는 인우씨의 13대조 할아버지인 학수당(鶴睡堂) 홍춘(弘春) 할아버지 때부터로 400여년전이다. 임란때 창의해 공을 세운 학수당은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돼 기강현감을 제수받는 한편으로 남산 12봉과 태화강 30리를 사채지로 받았기 때문이다. 흥례서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이 모두 예전에 문중들의 소유였다. 학수당의 고택은 지금 태화사의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300년동안 지속됐다.

 인우씨는 "정자 명칭이었던 말응정이 지금은 명정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물론 태화동 지역의 상당부분 지명이 모두 이 때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마비가 있는 곳인 지금의 희마아파트 뒷쪽을 하말이라고 불리는 것 등이다.

 인우씨는 "광복 이전인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문중의 가세가 번창하였으나 지금은 쇠해 선대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며 "장무공과 학수당 할아버지 등 4위를 모시기 위한 재실공사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본채를 흥례서원이 있는 이곳으로 옮긴 것은 100여년 전 인우씨의 조부때로 새로운 기운을 얻어 문중의 번창을 기원해서 였다. 신기마을로 불리는 이곳은 골짜기 너머 태화사부지에서 새롭게 자리잡은 곳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재 후손들은 외지로 나가 이곳에 적을 두고 있는 이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인우씨는 현재 본적을 신정동에 두고 있다. 선조들이 말응에서 집을 옮길 때면 강건너 신정으로 하라는 말을 지금에야 이행한 셈이다.

 울산박씨는 그 오랜 기원과 명성만큼이나 많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고려시대 수도인 개성의 송경파를 비롯해 용당종파, 대흥종파 등 28개파가 있다. 또 고려와 조선시대 문무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일제시대에도 노명, 문희, 원호, 성로, 형관, 윤환 등 많은 독립투사들을 배출했다.

 현대에서는 전 울산읍의원을 지낸 상용씨, 울산향교 재단이사장을 역임한 주복씨, 현재 대종회 종유사를 맡고 있는 한학자 주엽씨, 울주군청 전 농정과장 주호씨, 울산상공회의소 2대 회장인 진연씨, 울산고 교장 영호씨,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공업씨와 시인인 영식씨 등이 있다.

 또 중구의회 의원인 태완씨, 남구의회 의원인 복일씨, 중앙농협조합장 인혁씨, 울산대 교수 주철·경삼씨, 그리고 울산시청 서기관 인필씨 등도 집안이다.

 현재 대종회를 이끌고 있는 명순씨는 울주군의회 초대 의장을 지냈고, 청년회장 수복씨는 대륙금속을 운영하고 있으며, 청년회 사무국장 원양씨는 울산대 홍보팀장을 맡고 있다. 서찬수기자 sgij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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