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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기획특집특집
[기획]최치원 선생의 후손 최현범씨 ‘잠방골 천석꾼’1. 국도 7호선 시대 - 3) 울산의 부자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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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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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로 이름 난 부인 ‘다개댁’ 재산증식에 크게 기여
둘재 영근씨 5~6대 국회의원…7대때 낙선 정계 떠나
경제적 어려움에 보험회사 월급 사장으로 자리 옮겨

잠방골은 대곡댐이 생겨나면서 수몰되었지만 옛날에는 지형적으로 첩첩산골이었다.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삼정리 하삼정에 속했던 이 마을은 60년대 초 울산이 시로 승격되기 전만 해도 울산군청 공무원들이 출장을 가려면 꼬박 하룻길이었다.
   
 
  ▲ 대곡댐이 생겨나면서 수몰된 하삼정 잠방골에는 일제 강점기 때 천석꾼 최현범씨가 살았다. 고운 최치원 선생을 중시조로 모셨던 경주 최씨 정랑공파 천전 문중에서 이 마을로 처음 들어온 사람은 현범씨의 증조부인 영보(泳輔)씨로 조선시대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이 때문에 울산 사람들은 이 마을에 천석꾼이 살았다는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이 마을 천석꾼은 고운 최치원 선생을 중시조로 모셨던 경주 최씨 정랑공파 천전 문중의 현범(鉉範)씨였다.

최씨 문중에서 처음 이 마을로 들어온 사람은 현범씨의 증조부인 영보(泳輔)씨로 그는 조선 시대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최씨 가문에서 재산을 가장 많이 늘인 사람은 현범씨로 특히 부인 권씨가 대단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권씨는 가까운 언양 다개 마을에서 이 집안으로 시집을 왔기 때문에 택호가 ‘다개댁’이었다.

일제 강점기 다개댁이 며느리를 보았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밥을 적게 먹을 것으로 생각해 밥그릇에 밥을 적게 담아 올렸다. 그랬더니 이 시어머니는 “이 집 재산을 모두 내가 이루었는데 왜 이처럼 밥을 적게 주느냐”면서 며느리에게 호통을 치면서 밥상을 물리쳤다고 한다.

실제로 이 집 재산은 다개댁이 소작인들을 잘 관리하고 머슴들을 잘 다독거려 늘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범씨는 세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큰 아들은 한국동란 때 일찍 죽고 둘째 영근(泳謹)은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가 공부를 했기 때문에 셋째 영극(泳極)씨가 어머니와 함께 집안일을 했다.
   
▲ 최영근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제일생명보험회사에서 전무이사까지 지냈던 박임근씨가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최 부자집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영극씨가 집안일을 하면서 가장 겁을 내었던 사람이 어머니 다개댁이었다. 나중에 영근씨의 보좌관이 되어 이집을 자주 드나들었던 박임근(79·서울 거주)씨도 최 의원의 어머니가 여걸이었다고 말한다.

“최 의원이 낙선해 운동원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나타나더니 운동원들을 향해 ‘이번 선거에 졌다고 슬퍼할 것 없다.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 선거에서 이기면 되는데 왜 이렇게 야단들이냐’면서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 주어 정말로 권씨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최씨 집안은 농지개혁 전까지만 해도 두동과 언양, 경주 일대에 논이 많았다.

이 집안이 유명하게 된 것은 울산에서 5~6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영근씨 때문이다. 두동초등학교 23회 졸업생인 영근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 보성전문학교로 진학했다. 옛날 울산사람들이 영근씨와 함께 강정 부자집의 김창식씨, 축구왕 최성곤씨를 ‘보성 3 인물’로 부르는데 이것은 이들 3명이 비슷한 시대에 당시로서는 보통 사람들이 가기 쉽지 않은 보성전문학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현범씨는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망국의 국민으로, 해방 후에는 분단된 나라의 국민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제 강점기에 겪었던 고통은 영근씨의 징집이었다. 그런데 징집을 받고 열차를 타고 만주로 가던 영근씨가 기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 일본 헌병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고향 집으로 도망을 온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학도병이 이처럼 탈출하면 가족 전체가 일본 헌병대에 불려가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그런데도 현범씨는 도망 온 아들을 아무도 모르게 마을 뒷산에 숨겨 놓고 해방이 될 때까지 일 년 넘게 돌보았다. 이 때 천석꾼 현범씨가 느꼈던 망국의 서러움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집안이 겪었던 또 하나의 슬픔은 장남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동족의 손에 죽은 것이었다. 해방 후 이 땅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동족 간 이념 논쟁이 벌어졌고 이 때 남쪽에서는 지주들과 그의 가족들이 빨치산들에 의해 많이 살해되었다. 해방을 전 후해 현범씨의 큰 아들은 두동면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했다. 그런데 빨치산들이 이 아들을 지주의 자식이라면서 잠방골의 집을 불태운 후 살해한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했던 많은 재산이 오히려 이 때는 화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둘째 아들 영근씨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하는 데는 재산이 큰 도움이 되었다. 영근씨가 처음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해방 후 초대 도의원이 되면서다.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대중 연설에 능했던 그는 약관의 나이에 도의회에서 내무위원장이 되었다. 도의원 시절 자유당에 반기를 들고 민주투사의 기질을 키웠던 영근씨에게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그것은 한국동란으로 국회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부산으로 갑자기 온 국회의원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이 때 부산으로 온 국회의원들 중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은 영근씨는 동생을 시켜 여야 가리지 않고 이들에게 쌀 한가마니씩을 주었다.

영극씨는 정치력은 없었지만 형을 성심성의껏 도왔던 인물이다. 4대 총선 때 영극씨의 권유로 영근씨를 도운 후 나중 전규열, 박승갑씨와 함께 ‘울주군 야당 삼총사’가 되었던 안도원씨(81)는 “당시만 해도 농촌에서 야당 일을 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했기 때문에 4대 총선에서 영극씨가 형을 위해 나에게 일을 해달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가 어찌나 자주 찾아 와 권유하는지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최씨는 4대 선거에서 낙선, 비록 원외였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김영삼씨를 민주당 경남 수석 부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당내 정치적 비중이 컸다.

그러나 천석꾼의 아들 영근씨는 돈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도의원 생활을 거쳐 4대 총선 때만 해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이후 선거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영근씨는 울산에서 4대에서 7대까지 4번 출마해 5대와 6대 두 번 당선되고 두 번 낙선했다. 이 중 그가 여당 후보로 당선된 것은 자유당이 붕괴되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던 5대 뿐이었다.

최씨가 7대 선거에서 낙선 한 후 울산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제일생명보험회사로 간 것 역시 경제적 어려움 때문으로 보는 이가 많다. 최 의원의 보좌관을 거쳐 최 의원과 함께 제일생명으로 가 이곳에서 전무이사까지 지낸 후 정년퇴임했던 박임근씨는 최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최 의원은 한마디로 돈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7대 선거에서 낙선한 후 제일생명으로 간 가장 큰 이유도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7대 선거에서 낙선한 것도 물론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최 의원은 돈이 없어 선거운동원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투개표 참관인까지도 일당을 주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는데 자금이 없다보니 선거에 이길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나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돈이 없어 선거에 질 것같다는 얘기를 하면 최 의원은 ‘우리가 언제 돈 갖고 선거를 했느냐’면서 부정한 돈을 선거자금으로 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선거가 끝났을 때는 최 의원은 물론이고 그만 믿고 그동안 그를 따라 다녔던 사람들도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최 의원이 정치를 그만 두고 제일생명으로 간다고 할 때 측근들 중에는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 기회에 정치를 그만 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최 의원은 제일생명에 근무할 때도 월급쟁이 사장이었는데 제가 제일생명에 들어가 보니 자금계획만 잘 세우면 최 의원이 월급쟁이 사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최 의원에게 이 방법을 자세히 설명을 했더니 며칠 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제일생명을 개인 회사로 만드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라면서 거절하는 바람에 끝내 그가 월급쟁이 사장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제일생명 사장으로 있는 동안 윗사람으로부터 신뢰를 얻어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를 모두 거절하는 것을 보고 부자집 아들이 역시 다른 면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잠방골은 수몰될 무렵 10호가 거주했다. 최 의원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갔다. 그리고 13대 국회때 평민당 부총재로 국회에 다시 들어갔던 그는 이후 정계에서 물러난 후 경기도 성남시에서 살다가 10여년 전 타계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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