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80만명에 이르는 ‘불량 대출자’가 쏟아진 것은 가계부채의 부실 우려가 점차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징조다.
 ‘정상’과 ‘부실’의 경계에 선 한계 대출자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줄줄이 부실 대출자로 주저앉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량 대출자는 더 늘어날 공산이 매우 크다. 대출자 개인의 문제를 넘어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 경제적 상위계층보다 하위계층에서 훨씬 심각한 ‘부실의 양극화’ 양상도 보인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대응이 이미 한발 늦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더 허송세월하면 강력범죄와 이혼이 급증하는 등 사회불안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해 100명중 5명 ‘불량’…다중채무와 관련 커
 나이스신용평가정보는 16일 대출자 1천667만6천명의 불량률을 공개했다. 불량률은 최근 1년간 채무 불이행으로 은행연합회에 통보되거나 3개월 넘게 원리금 상환을 연체한 대출자 비율이다.
 한 해 동안 새로 ‘불량 딱지’가 붙은 대출자는 79만7천명이다. 100명 가운데 5명꼴로 부실차주가 된 셈이다.
 가계대출의 불량률은 날로 심각해지는 모습이다. 지난해 말과 비교해 평균 불량률은 4.67%에서 4.78%로 상승했다.
 불량 대출자는 다중 채무자(여러 금융회사에 빚을 진 대출자)와 밀접히 관련됐다고 나이스신용평가정보는 설명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가 대출자 6만2천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금융회사 여러 곳에 빚을 질수록 대출자의 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 부담률이 훌쩍 높아진다.
 금융회사 1곳에 빚을 지면 부담률은 18%지만 3곳(23%), 5곳(25%), 7곳 이상(28%) 등 다중 채무가 쌓일수록 부담이 커져 불량이 될 확률이 커진다.
 금융감독원은 실물경제의 충격이 대출 부실에 영향을 주는 데 6개월 정도 걸린다고 분석했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가계소득과 부동산가격이 20~30% 내리면 금융권도 가계부채의 2.1%를 손실로 떠안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는 금융권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어서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이 위협받는다고 연구원은 우려했다.
 금감원 은행감독국 권창우 팀장은 “은행들이 이에 대비해 충당금을 더 쌓고 부실채권을 적극적으로 정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저소득층 불량률 훨씬 높아…부실 양극화
 불량대출의 또 다른 문제는 소득수준이나 신용도에 따른 양극화가 매우 심하다는 점이다.
 고소득자가 많은 신용도 상위등급은 불량이 거의 없다. 주택담보대출을 보면 1등급 0.09%, 2등급 0.14%, 3등급 0.25%, 4등급 0.48% 등으로 불량률이 1%를 밑돈다.
 그러나 저소득자가 분포한 신용도 하위등급으로 가면 불량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7등급 7.97%, 8등급 20.30%, 9등급 26.69%, 10등급 45.90%다. 7~10등급의 평균 불량률은 약 18%다.
 상위등급은 지난해 말과 비교해도 불량률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지만, 하위등급은 2%포인트 상승했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경제연구부문장은 “저소득층의 생계 현황을 살펴보면 이런 현상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통계청의 소득 5분위별 가계수지를 보면 소득 1분위(하위 20%)는 올해 1분기 월 소득이 지출보다 35만3천원 적다. 저축은커녕 빚을 내 살기도 바쁘다는 의미다.
 소득 5분위(상위 20%)가 쓸 곳에 다 쓰고도 월 244만8천원을 남긴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소득의 양극화가 부실의 양극화로 이어진 셈이다.
 1분위의 월평균 적자는 2003년 1분기 26만9천원에서 갈수록 커졌다. 같은 시기 147만3천원이었던 5분위의 흑자가 더 커진 것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정부 늑장대응도 한몫…“사회불안 커질 우려”
 전문가들은 정부의 대응이 굼뜬 것도 불량 대출자가 무더기로 쏟아진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부랴부랴 대출자 이자부담을 줄이려고 나섰지만, 금융회사를 압박하는 방식은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아니라 금융회사의 건전성만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가계부채의 규모를 관리하려다 보니 대출이 늘지 않고, 그 결과 상환 능력이 약한 저소득층부터 부실이 드러나는 ‘역(逆) 유동성 효과’도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선빈 수석연구원은 ‘좋은 일자리’가 부족해진 게 문제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했다. 고용, 소득 등 거시경제정책이 실패한 탓이라는 얘기다.
 김 연구원은 “해고와 은퇴가 늘자 생계형 자영업자가 초과 공급됐고, 영업이 부진하자 집을 담보로 맡겨 생활비를 빌렸지만 갚을 길은 막막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취업자 2천400만명에서 대기업 직원(100만명), 공공기관 종사자(130만명), 안정적 자영업자(200만명) 등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소득이 적거나 불안정하다고 추정했다.
 신민영 부문장은 “앞으로 저성장 기조가 지속해 저소득층의 대출 불량 문제도 커질 것”이라며 “범죄와 이혼 등 사회불안 현상이 늘어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그는 “의료서비스, 레저ㆍ여가산업 등 내수를 진작시키는 게 유일한 해법이다”라며 정부가 이들 분야의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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