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보면서 이젠 희망과 희열을 이야기한다. 월드컵축구 열기가 한반도를 휘감았던 2002년 6월 우리 국민들은 태극기 물결과 4강 신화를 지켜보며 벅찬 환희를 느꼈다. 남녀노소 모두 ‘대∼한민국’을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붉은 악마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하나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일본,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와 벌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근 A매치에서도 그 열풍은 계속됐다. 대형 태극기를 받쳐든 관중들의 함성은 상대팀을 주눅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루과이의 카라스코 감독은 경기를 앞둔 출사표에서 관중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부담스럽다는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들이 일찍이 맛보지 못한 태극기 열풍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고 거룩하고 엄숙하기만 했던 국기는 패션·팬시 등 생활 속에서 자리잡고 있다.

일년 내내 펄럭이는 국기

 기성세대에게 태극기는 엄숙하고 근엄하게 자리한 나라사랑의 표상이다. 일제시대에 학교를 다니며 일장기를 국기로 알고 지낸 노년세대에게 태극기는 조국의 의미로 자리매김 했을 것이다. 8·15 해방 직후 당신들은 처음으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조국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웠을까. 요즘엔 초·중·고와 대학 등 각급 학교에서 아침과 저녁 하루 두 차례씩 열렸던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지난 2001년 새 학기를 앞두고 ‘국기에 대한 규정(대통령령)’이 개정되면서 부터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기타 공공단체 청사와 각급 학교와 군부대는 일년 내내 국기를 반드시 게양해야 하는 장소로 지정됐다.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한 태극기 달기 캠페인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울산지역에서는 올해로 5회째를 맞는 경상보훈대상 시상식이 20일 열리는 것을 비롯해 각종 추념행사가 다채롭다. ‘해군 군악대 초청공연’과 시립교향악단의 6·25 특별연주회도 마련됐다. 해마다 현충일이 들어있는 6월이면 어김없이 소개되는 단골뉴스가 있다. 순국선열을 추도하기 위해 제정한 현충일에 조기(弔旗)를 게양한 집이 적다는 얘기다. 국민들이 지켜야 할 도리라는 점과 어린이들에게 나라사랑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실린다.

눈감은 참석자들

 백골전우회 울산지회가 마련한 백골위령제가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의 백골부대 위령탑 위패 봉안지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다. 6·25전쟁 당시 함경북도 봉강전투에 최첨병 부대로 투입됐던 3사단 18연대 6중대 부대원의 넋을 기리기 위한 행사다. 당시 160여 부대원들은 전세가 불리해져 모든 병력이 철수한 뒤에도 마지막까지 남아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태극기가 걸린 분향소는 고인들의 호국정신을 되새기는 마음으로 사뭇 진지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13일 열린 진백골 6중대 추모식장에 걸렸던 태극기가 구설수에 올랐다. 4괘 가운데 건(乾)의 위치가 오른쪽 상단으로 올라가 있고 태극무늬도 반대 방향으로 걸리는, 태극기가 뒤집혀 걸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독자 이용호씨는 그 다음날 본지에 보도된 사진을 보고 이 어이없는 장면을 찾아냈다. 그는 “사람이나 글자를 보면 거꾸로 인화된 것도 아니다. 600여명이 참석한 행사에서 태극기가 뒤집힌 채 걸린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점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지난해 월드컵 기간동안 자비로 제작한 태극기 스티커 수 만장을 문수구장을 찾은 외국인들과 시민들에게 직접 나눠주었던 30대 직장인이다. 그가 찾아낸 ‘잘못 걸린’ 태극기는‘옥의 티’가 아니라 태극기의 의미를 진정으로 느꼈어야 할 행사장이어서 더욱 씁쓸하다. 지금도 그대로라면 헌화를 하고 분향을 하고 추도사를 읽는 일 자체가 부질없는 짓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잘못 걸린 태극기는 차라리 걸지 않은 것만 못하다. bigbell@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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