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알고 있다. 단지 말하지 않을 뿐이다."

 이 말은 세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이 말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다만 말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패러디 하고 싶다.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말,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하는 말만 들으면 일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실제 행동거지를 알게되면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남을 비판하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본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

 자기의 잘못은 선반 위에 얹어 놓고 남의 잘못만 지적해서는 곤란하다. 소위 남의 눈 속 티끌을 보면서 자신의 눈에 든 들보는 무시하는 언동은 비난받게 된다.

 어릴 때 읽은 동화에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가 있다.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려 뭍에 나온 거북이가 토끼를 만났다. 감언이설로 토끼를 속여 물 속으로 데리고 간다. 용왕 앞에서 간을 달라는 요청을 받은 토끼는 간을 육지에 두고 왔으니 돌려 보내주면 두고 온 간을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그런 줄 알고 용왕은 거북이를 시켜 토끼를 다시 뭍으로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다. 간을 빼두고 다닌다는 토끼의 이야기는 현재 우리들의 빈 마음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토끼의 간을 양심이란 말로 대치시켜 본다. 오늘의 우리 사회에는 간은 다른 곳에 두고 다니는 토끼처럼 집을 나설 때 양심을 문설주에 걸어놓고 다니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양심이 없기에 남을 속이고, 법을 어기고, 도덕을 무시하고, 공의를 휴지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이래서야 어떻게 사회가 바로 서고 나라가 부강해지고 인정이 두터워지며 사랑이 피어날 수 있을까? 자라나는 세대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양심은 모든 도덕과 법에 앞선다. 윤리라는 개념과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양심은 있었다. 따라서 양심은 모든 도덕과 법의 기초요, 근원이다. 그런데 세상살이 속에서 사람들은 양심이 둔해지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한다.

 우리주변에는 자기 말만이 정의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남이 하면 불륜이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공의인지 국민들은 알고 있다. 국민들은 현명하다.

 고종 때 시강원 선생이었던 해강이 순종이 세자 시절 정치의 나침반이 되는 민심을 알아보는 법을 알려줄 때 쓴 말이 생각난다. "세사문초객(世事問樵客)" 세상일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나무꾼이나 민초들이 잘 알고 있으니 그들에게 물어보라는 뜻이다. 그렇다. 국민들의 마음속 저울대에는 지도자, 위정자들 언동의 진실여부가 눈금으로 표시되고 있다.

 공인은 책임 따른다. 일거수 일투족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밝은 면 뿐 아니라 그늘 진 부분도 보인다. 사인의 경우라면 묵인하거나 애교로 봐 줄 수 있는 것도 공인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공인이 사석에서 한 말,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대해 구차스럽게 변명하거나 합리화시키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 등 진땀 흘리는 경우를 목격할 수 있다.

 국민들이 침묵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공인의 가식적인 말, 위선적인 행동에 심판을 할 것이다. 무심코 뱉은 말이든, 의도적으로 한 말이든, 비양심적인 말이 부메랑이 되어 올 수도 있다.

 바쁠수록 가끔은 숨을 돌리고 제 모습을 거울로 돌아봐야 한다. 자칫하면 자신도 헝클어지고 방향마저 잃는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우리의 언동을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보자. 우리 모두 잃어버린 양심을 찾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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