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巨里)는 상북면 13개 법정 동리의 하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거리(巨里)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8년 상남·하북 양 면을 합해 상북면 관할이 됐다. 이 곳을 토박이말로 "엥기"라고 부르는데, "거리"는 냇가를 뜻하는 "걸"의 음전(音轉)에 의한 차자(借字)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 보(洑)를 만들어 거리(巨里)와 길천리(吉川里)까지 농사를 짓는데 이를 오산보(吾山洑)라 한다. 길천(吉川)마을은 신라 때 큰 가뭄이 들어 하천도 우물도 다 말라버린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재해를 조사하다가 행화정(杏花亭)에서 좋은 물이 솟아나왔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농사지을 물이 모자라 거리와 다투게 되었다. 거리에서 자기네 마을 물이라 하여 길천리에 물을 내려 보내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물싸움은 거의 10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결국 송사로 이어져 두 마을이 10년 동안 법정에서 다투다가 결국 길천리의 승소로 끝맺음을 했으나, 소송비용으로 거리는 논 80마지기, 길천리는 70마지기나 소모되었다.

 그 후에 누군가가 나서서 두 마을이 합심해 못을 막기로 하고 만든 못이 "오산못(오산보)"이다. 이로 인해 한 세기를 끌어 온 두 마을 간의 갈등은 끝이 났다. 하지만 이 공사로 인해 지곡 마을 20여 호가 철거되는 희생도 감수해야 했다. 제방공사를 할 때 망깨를 놓으면서 지곡주민을 위로하고 오산평야를 노래했는데, 그 소리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망깨야 어서 하자 너와 나와 인연되어/ 잠시라도 허술하면 백천만사 허사된다. 천지만물 생겨날 때 용시용처 천정이라/ 화류춘풍 호시절에 우연히 만났도다. 이 못자리 정하기로 백 천만인 하는 말이/ 천작이라 청룡등은 인작같이 둘렸는데 지곡주민 20여 호 무가내라 할말 없네/ 이 말씀이 전해오기 50여년 지는 중에" (중략).

 물싸움은 오랜 인류사에서 상시로 있어 온 일이다. 수리(水利)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빗물에만 의존해 농사를 짓는 천둥지기인 몽리답(蒙利畓 천수답)에서는 어쩔 수 없이 흐르는 물을 막아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강의 상류 쪽에서 욕심껏 물을 쓰거나 함부로 더럽힌다면 하류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도리가 아닐 것이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할 때 용지 소유권 100%를 확보하지 않으면 개발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해 한 평도 채 안 되는 땅을 구입한 뒤 174배의 차액을 남긴 사람이 있었는데 그 것이 소위 "알박기"수법이다.

 거리와 길천리 주민들은 처음엔 어디서나 흔히 있을 수 있는 물싸움을 벌였다가 마침내 마음을 합해 공동의 보를 만들었다. 거리 사람들의 후덕함이 돋보이기도 하지만 지곡주민 20여 호의 주민들은 다수의 유익을 위해 조상의 숨결이 밴 집터를 포기했다. 원주민들 틈에 슬그머니 알을 박아 일확천금을 노리는 못된 행실을 예사로 보아온 오늘의 우리 눈에 그들의 고귀하고 값진 희생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