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가 서린 땅 경주. 그 경주의 산 가운데 유적이 없고 전설이 없는 산이 어디 있을까마는 으뜸은 단연 남산이다. 신라 사람들이 천년을 보듬어 땅 위에 만든 불국토이니, 당연히 남산이 으뜸을 차지하고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즉, 남산은 땅 위에 옮겨진 부처님 세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남산은 그 자체가 신라의 절이며, 신라 사람들의 신앙처인 셈이다.

 경주 남산은 468m의 금오산과 494m의 고위산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마흔여 골짜기와 산줄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 길이 4Km, 남북 길이 8Km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모습인데,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남산은 바로 신라 그 자체였다. 신라 건국설화을 간직한 나정과 신라의 종말을 보여준 포석정이 남산 기슭에 있다. 신라 역사의 시작과 끝이 곧 남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남산에는 삼국유사에 있는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란 말처럼 절터와 탑들과 자연 바위에 새겨진 부처상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뿐만 아니라 왕릉을 비롯한 수많은 고분과 산성터 등도 있다.

 이런 곳이기에 남산을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하지 마라고 한다. 그 것은 남산은 그 자체의 자연의 아름다움에다 신라 사람들의 그 빼어난 미의식과 신앙심으로 빚어진 이상세계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남산은 적막을 더욱 깊이 맛보게 한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적막에 잠겨보게 하는 겨울 산길은 남산만한 곳이 없다. 산길을 따라 거닐다 보면 제 몸을 부딪쳐 물길을 튀우는 청아한 물소리와 솔바람 소리를 만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눈과 귀가 새롭게 열리고, 산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산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도 열리는 법.

 그렇게 계속 산길로 접어들면 저 멀리 솔밭에서 그윽히 굽어 보고 계시는 부처님도 마주치게 된다. 천년 세월을 건네 온 소박한 미소를 오늘에도 마주할 수 있다는 것. 가슴에 치솟아 오르는 이 감동. 큰 환희에 온 몸이 전율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을랴.

 남산 어느 곳이나 다 이러하다. 곳곳에 있는 바위에 피가 돌아 천년을 살아온 부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 말하지 않지만 큰 말씀을 전하고 계시다. 그 속내를 짐작키나 할 수 있까마는 남산 곳곳에서 마주치는 부처님의 미소에서 겸허함을 배운다.

 90년대 초부터 남산을 찾기 시작한 정일근. 도반들과 함께 보름밤이면 남산을 오르는 등산 모임을 만들어 지금껏 어김 없이 보름 밤에 남산 야간 등반을 계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산 사랑 운동의 하나로 모감주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정말이지 남산행은 그에게 큰 전환점이었다. 자연에 대해 새롭게 눈뜸은 물론 시세계가 휠씬 넓어지고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경주 남산에 바친 그의 노래는 단순히 시 창작품으로서의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다. 바로 그 것은 남산에 쏟은 그의 육신 공양에 다름 아니다. 그만큼 그는 육신을 바쳐 남산을 사랑하고 남산을 노래해 온 것이다.

 무릇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해가 뜨는 동해에

 그 바다를 향해 웅크린 산줄기에

 사랑한다는 약속 새기지 마라

 바다도 산도 둔갑을 한다

 시간이 내는 발자국 앞에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자연

 지구별에서도 해마다 사막은 늘어나고

 그리운 바다는 줄어든다

 행여,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마음은 산중 운수납자도 열지 못하는

 나무서랍 속의 낡은 비밀서류일 뿐이려니

 경주 남산 수리봉에 올라 하늘을 보라

 제 성좌로 찾아와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과

 보름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몸을 굴리며

 제자리로 돌아오는 둥근 달

 약속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랑 있으니

 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는 약속 있으니

 경주 남산 머리 위로 보름달이 뜨는 저녁

 사랑, 그 아름다운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우리 약속을 보라

 우주의 모래알 같은 작은 지구에서

 욕계육천 우주를 환히 비추는 우리 사랑을 보라 (정일근 시 〈사랑의 약속-경주 남산〉 전문)

 남산에 쏟은 그의 마음은 정녕 뜨거웠다. 남산 마흔 골짜기 가운데 그가 찾지 않은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남산의 봄을 넘어 여름으로, 그 여름을 건너 가을, 겨울로 사철 남산을 오르내린 그. 그런 그이기에 보름 달 뜨는 저녁이면 그리움의 마음 문을 열고 땅 위에 만들어진 부처님 나라를 찾아 남산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리라.

 정일근에게 남산은 정신의 안식처이다. 정일근은 1998년에 8년여의 남산행에서 길어 곰삭힌 시들을 모아 그의 다섯 번째 시집 "경주 남산"을 펴냈다. 시집 "경주 남산" 1부에는 경주 남산을 승화시킨 31편의 시가 실려 있다. 어느 것 하나 남산을 허투루 노래한 것이 없다. 육친을 원천적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남산에 대한 그의 원천적인 사랑을 진하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경주 남산의 천년 세월과 함께 어우러져 시로서 담보할 수 있는 삶의 절정을 선연히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이다. 이들 시편은 남산의 이끼 낀 푸른 돌 속에 잠긴 사랑을 신라 천년의 바람에 실어 아련히 전해주고 있다.

 우리가 경주 남산을 탁월하게 해석한 정일근의 시집 "경주 남산"에서 마주친 신라 천년의 미소를 그려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제 정일근을 따라 그리움의 마음 문을 열고 경주 남산행을 해볼 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곳엔 당신을 기다리는 천년의 소박한 미소가 아름아름 고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권일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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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첩〉

정일근시인은 1958년 경남 진해 출생으로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4년 "실천문학"에 "야학일기"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뒤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됐다. 2000년 한국 시조작품상, 2001년 시와 시학사의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2001년 7차 교육과정에 따라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유리창〉이 수록됐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처용의 도시", "경주 남산",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시선집 "첫 사랑을 덮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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