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방송과 관련된 담론에 이렇게 빠져 들고 있는가? 그것들이 무엇이기에 지역도, 종교도, 지위도, 학력도 무기력한가? 방송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자 변화의 핵심적 동인이었다. 그 방송을 통해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해 왔고, 그 방송에 의존해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가족계획을 설득시켜 왔으며, 그 방송에 의해 우리 삶의 형식과 질이 모양지어져 왔다. 그야말로 방송은 우리에게 문화이자 가치였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까지 방송 수용자들은 방송국의 "밥"이었다. 수용자의 이중적 성격, 방송국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온 셈이다. 그 이중(二重)의 첫 번째 중(重)은 방송 소비자로서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중(重)은 끊임없이 일정한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해 줌으로써 방송국이 광고주 앞에서 계속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성방송의 지상파 재송신" 문제를 놓고 중앙과 지역의 한판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성숙한 방송시장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위성방송이니 만큼 디지털 위성방송 업자야 어차피 무리수를 둘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지상파 3사의 힘을 등에 업고 초기 가입자들을 확보하는 방안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결정은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을 판 셈이 되어 버렸다.

 우선 지상파 3사의 방송의 질을 과대평가하여 위성방송의 핵심적 내용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은 그만큼 위성방송의 준비수준을 가늠케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위성방송이 케이블 방송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고민한 결과가 결국 지상파 방송과의 동맹이라는 사실이다. 수요가 공급을 이끌지 못하고 공급이 수요를 지나치게 앞질러 나가는 경우 실패의 가능성은 배가(倍加)될 터인데, 시장수요가 성숙되지 않은 시점에서 위성방송 본방송 개시가 석달 전으로 다가왔으니 다급해질 만도 하다.

 이러한 상황이 결국은 지상파 방송의 위성방송 재전송 결정을 가져오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정책결정의 후유증은 위성방송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초기 가입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지상파 방송을 재전송하고, (우려하기는) 미국의 위성방송 사업자 "디렉TV"처럼 케이블 채널 마저 끌어 들여 소비자를 유혹한다면 위성방송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미국이 그렇다고 우리는 어떠랴 하는 생각은 제발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광활한 대지에 2천500여 개의 케이블 채널이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 케이블 미가입자를 대상으로 벌이는 위성방송 사업자간의 경쟁은 기존의 방송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상파·케이블 방송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여 위성방송의 본질과 특징을 실현시켜 준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미국은 우리와 엄연히 다른 시장이고 방송에 대한 접근이 다른 나라이다.

 방송이 보편적 시장의 원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간의 경계를 허물고 아무런 제약 없는 거래만이 최고의 선(善)에 이를 수 있다는 허망한 자유주의의 믿음을 방송에만은 적용시키지 말자. 아무리 미디어 생산물이 사적 기업과 선진 몇 나라의 부가가치를 극대화 시켜주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을지라도 방송에 대한 우리만의 철학이 요구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 삶에서 방송이 지니는 역할과 문화적 가치를 생각할 때 시장의 손에 모든 것을 쥐어준다면 우리 국민이 평등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방송영역은 세상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남겨져야 할 마지막 문화적 보루이다. 특히 한국에서의 방송은 더욱 그러하다. 만약 방송정책으로 인하여 방송이 가진자의 것, 권력자의 것, 중앙의 것, 지상파 3사의 것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확보할 길은 더 이상 없다. "이래저래 빼먹을 대로 다 빼먹고 오갈데 없으니 나몰라라 하는 꼴인가"하는 원망이 두렵다면 원칙대로 하는 수 밖에 없다. 지역사회 발전과 지역문화의 고유성을 실현하기 위해 지역민방이 허가되었다면 그럴 수 있도록 정책이 이끌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스터플랜(master plan)이 있는 방송정책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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