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재 선생은 주역을 암송하고 육경에 통달했으며 시문에 뛰어나 당대의 문장가 이규보와 최자, 이제현 등으로부터 글뜻이 굳세고 준수하며 운율에 있어서도 무리하지 않고자연스럽고 애절하고 비장하며 운치가 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시문이 대부분 사라지고 없고 그나마 파한집 보한집 백운소설 동국이상국집 등에 몇편의 시가 전해진다.
"골짜기엔 외로운 충정 붉기만 하고/ 재주와 명성에 두 갈래 귀밑머리 희기만 하네./ 영화와 은총은 구하지 않으니/ 천지간에 떠 있는 꽃이로구나"(보한집에 실린 〈자서·自敍〉)
책은 그의 시 10편을 담은 1부 시편, 이인로 이규보 임춘 등 그가 교류하던 당대 문장가들이 그를 생각하며 쓴 글 21편을 담은 2부 증시편, 그에 관한 기록들이 들어있는 문헌 자료를 발췌하여 정리한 3부 자료편, 근래들어 학자들이 그에 관해 연구한 논문 13편을 모은 4부 연구편으로 구성돼 있다.
오세재 선생의 후손인 오민필씨는 "선현의 시문이 오늘날 문화의 뿌리가 된다"며 "선현의 뜻을 계승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오세재는 송도출생으로 18세때(1151년) 진사에 오르고 이어 대과에 급제(1182년)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만년에는 경주에 머물면서 이인로 이규보 임춘 등 당대의 문장가들과 교류했다. 그의 흔적으로는 경주 선도산에 도산재가 있으며 문학비가 전북 고창읍 아산면 삼인리와 경주 두곳에 세워져 있다. 정명숙기자 jsm@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