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부

주전동에는 조선 세조(1455~1468)때의 봉수대가 있는데, 높이 약 6m, 직경 약 5m인 교신탑과 주위를 보호하기 위한 직경 약 12m의 보조축대가 원통형의 석축으로 남아 있다.

봉수 또는 봉화제(烽火制)는 고려 의종 3년(1149), 서북병마사 조진약(曺晋若)의 건의로 채택되었고, 이후 주로 왜구의 침입 등 급보를 신속하게 왕에게 전달하기 위한 국방 통신방법이었다.

사전약정에 따라, 밤에는 봉(烽), 즉 횃불로, 낮에는 수(燧), 즉 나무로 연기를 내어서 신호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예를 들어 밤에는 다섯 가지의 적절한 불의 조합(調合)으로 그 뜻이 전달되었는데, 사태의 완급에 따라, 평상시 아무 일이 없으면 한번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두 번,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세 번, 경계를 침범하면 네 번, 적과 접전하면 다섯 번씩 올렸다. 그러나 구름이 끼거나 비바람이 불어서 연락할 수 없을 때에는 봉수군이 차례로 달려가서 보고하였다.

봉수의 간선(幹線)은 직봉이라 하여 서울의 목멱산(남산)을 종점으로 하여 병조에 보고되었다. 직봉 외에도 간봉이라는 보조선이 있어 본봉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락하였다. 조선에는 모두 5개간선 봉수망에 직봉과 간봉을 합하여 673개의 봉수가 있었다. 간선은 동북의 경흥(慶興), 서북의 강계(江界), 의주(義州), 서남의 순천(順天), 동남의 동래(東來)였다. 울산의 봉수대는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제2로 선상에 있으며, 경상도 동래에서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선이다.

 언양의 부로산 봉수대와 두서면의 구량과 서하리 사이에 있는 소산봉수대는 주봉이며, 양산군 장안면의 임랑포 봉수대, 아미포 봉수대, 서생면의 미길관 봉수대, 온산면 강양리의 하산 봉수대, 남화동의 가리산 봉수대, 화정동의 천내 봉수대, 주전동의 남목천 봉수대 그리고 강동면 당사리의 유포 봉수대는 해안의 간봉(間烽)이었다. 간봉망은 주봉에 연계되었다. 주전봉수대는 천내에서 봉수를 받아 유포로 전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봉수제는 전근대적 국가에서 애용했던 통신시설로서 국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고종 31년(1894)에 전화가 도입되고 나서 전통적인 봉수제는 폐지되었다. 봉수가 이동되는 루트는 현재의 마이크로 왜이브 중계소의 위치와 대부분 일치한다.

 한반도 전지역의 비행하는 물체는 모두 탐지한다는 조기경보기(AWACS)가 24시간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광케이블로 연결된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 정보전달시스템이 지구촌을 커버하는 이 정보화 시대에, 위경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면서 숨을 몰아쉬며 봉수대로 달려가는 어느 이름 모를 봉수군의 모습이 문득 보고싶다.

 일본과 가까워 필시 자주 이용하였을 울산의 봉수대는 주전봉수대를 제외하고는 많이 훼손되어 있어 고증을 거쳐 제대로 복원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