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부

명찰 통도사를 안고 있는 영취산이 동쪽으로 그 줄기를 뻗으면서 크고 작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옥동에 이르러 삼호산이 솟았고 신정동에 이르러서는 두리봉과 은월봉의 이름으로 빛나고 있다.

 사람들은 옥동에서 신정동에 걸쳐 연접하여 있는 크고 작은 열 두개의 산봉들을 "남산 12봉"이라 일컫는다. 예로부터 울산사람들 사이에는 이 남산 12봉 아래에 큰 명당이 있다고 회자되어 왔다. 왕생(王生)이들과 한림정터, 은월터가 그것이다.

 때는 조선조 중엽이었다. 국풍(國風)이라는 풍수지리의 대가가 울산에 왔다. 문수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두루 살피고 난 뒤에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남산 12봉을 타고 은월봉까지 왔다. 무엇인가를 찾았다는 표정으로 산을 내려온 그가 이윽고 달동에 이르렀다.

 달동의 옛 이름인 고지(串旨)가 뜻하듯이 이곳은 산세가 바다쪽으로 반도처럼 삐죽하게 돌출한 곳이었는데, 그 당시는 갈대가 우거진 간사지(干瀉地)였다. 그는 다시 삼백보 가량 갈대를 헤치고 오더니 미리 준비하여 온 쇠말뚝을 박고 난 뒤에 중얼거리듯 "왕생혈(王生穴)이로다"라고 말하였다.

 그 뒤 이곳에 밀려들어온 토사가 쌓여 들을 형성하니 사람들은 임금이 날 곳이라 하여 "왕생이들"이라 하였다. 그는 다시 팔등촌에 이르러 원당못쪽을 가리키면서 은월혈(隱月穴)이라 불렀다. 이 사람을 "남사고(南師古)"라 하는 이들도 있고 "성지(性智)"라는 인물로 보기도 한다. 남산 12봉 아래의 명당설은 큰 화젯거리가 되어 상찬하여 내려왔다.

 왕생(王生)이 들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경리부건물을 지은 일이 있었는데, 건축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쇠말뚝을 찾아 내었다하여 한때 화제가 됐었다. 광복 후에는 이곳에 강남국민학교를 지었다가 옮겼다. 일제 때 무덤실 근처에 울산농업학교를 지어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기도 했고, 또 원당근처에는 명당을 찾아온 무덤들이 많았다. 지금은 울산의 번화한 시가지 한복판으로 돌변했다.

 남사고는 조선 중기의 사람으로 역학, 풍수, 천문, 복서, 상법의 비결에 도통하여 그의 예언은 꼭 들어맞기로 이름났다. 그는 명종 말년(1567년경)에 벌써 선조 8년(1575)의 동서분당을 예언했고, 특히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을 예언한 유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성지(性智)는 조선중엽의 중으로 풍수지리에 밝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다.

 왕생이 들에서 왕이 난다고 예언했으니 나라를 이끌어 갈만한 큰 인물이 이곳에서 나올 것도 같다. 그러나 "왕"이라는 우리말은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거나 으뜸인 사람에게 왕왕 붙여진다. 오늘날 "최고의 자리"는 다양하다. 대기업의 총수, 컴퓨터의 달인, 과학자, 세계최고의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 등 최고의 자리인 왕의 자리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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