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가까운 이들과 함께 영화관에 갔다. 스님들과 조직 폭력배들의 절 생활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는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 영화가 스님들과 조폭들의 진면목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듣던 대로 재미있었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발견할 수 있어 유익했었다.

 극장 문을 나서면서도 교당에 돌아와서도 한 장면이 시간이 지남에도 더욱 선명해짐을 본다. 깨진 독에 물을 부어서 먼저 가득 채우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큰스님이 내 놓은 문제였기에 큰스님의 인정이 있어야 했다. 처음에 조폭들은 고무신으로 연신 물을 날라다 채웠지만 가득 채울 수는 없었다. 그 것을 보고 스님들은 궁리 끝에 항아리 속에 몸을 넣고 선문답으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 것을 큰스님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 후 조폭들이 갑자기 항아리를 들고 연못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이기게 된다. 그 기발한 착상에는 비록 폭력배라고 하지만 감탄할 만하다. 폭력배 두목이 큰스님께 묻는다. "왜 우리를 이 절에 더 오래 머무르도록 허락하셨습니까?" 노스님의 대답이다. "너희들이 깨진 독을 연못에 던진 것처럼 나도 너희들을 내마음속에 던졌다." 이 한마디 말씀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본다. 스님들이 폭력배들을 쫓아내기 위해 애쓰는데 비해 큰스님은 그 들을 일반인들과 구별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고 가여워 하는 마음을 보게 된다.

 원불교를 창교하신 소태산 대종사께서도 한 제자가 행동이 거칠고 악한 습관을 도무지 고치지 못하자 여러 제자들이 그를 돌려보내고 도량의 풍기를 깨끗이 함이 좋겠다는 말에 대하여 이렇게 답하신다. "그대들이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그가 지금 도량 안에 있어서도 그와 같으니 사회에 내 보내면 그 장래가 더욱 어찌 되겠는가. 또는 사회와 도량을 따로 보는 것은 소승의 생각이요 독선의 소견이니, 큰 견지로 본다면 사회의 부정이 곧 도량의 부정이요, 도량의 부정이 곧 사회의 부정이라, 도량의 부정만을 제거하여 사회에 옮기고자 하는 것이 어찌 원만한 일이라 하겠는가"하시고 그를 끝까지 지도하여 올바르게 살아가게 하셨다.

 도덕이 높은 큰 어른들은 사람의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않으시고, 도량과 사회를 따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로 보아 그 어느 쪽도 버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몇 명의 제자들만이 당신의 사람이 아니요, 몇 만평의 시설만이 당신의 도량이 아닌 것이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당신의 사람이요, 온 세계 시설이 다 당신의 도량인 것이다.

 혼탁함이 더해 가는 이 세상에 영화 속의 큰스님처럼, 소태산 대종사님처럼 그렇게 살아가고자 염원하지만 만 분의 일이나마 행하지 못함을 참회하며 세상의 악을 그대로 두고 홀로 닦음만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스스로를 반성한다. 또한 세상의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들어 내 마음에 빠뜨리고자 하나 그럴 수 없음을 한 해본다.

 그러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고, 상생의 세계를 염원하며, 세상 모든 죄업이 진리 부처님의 품안에서 목욕할 수 있기를 바라는 부처님께 드리는 심고를 통해서 하루를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마음만이 간절해지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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