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동(三山洞)은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 신리(新里), 신복(新福), 삼산(三山), 중리(中里)를 합하여 삼산리가 되었고,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삼산동이 되었다.

 조선조 중기 이전 삼산들이 모두 바다였을 때 학성공원도 바다 가운데로 쑥 내민 작은 반도였고, 내황동은 본래 그 이름이 내항으로서 바다에 면해 있었다.

 예로부터 이수삼산(二水三山)이라 하여, 이수는 태화강과 화진도, 또는 태화강과 동천을 말하고, 삼산은 삼산동에 나란히 솟아있던 세 개의 봉우리, 즉 삼산을 말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자라 모양을 한 산이라 하여 오산(鰲山)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臺)중,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露州"즉 "삼산은 반쯤 떨어져 푸른 하늘밖에 있고, 이수는 백로주를 가운데로 가르네"에서 유래됐다. 이백의 시에서 삼산이란 중국 남경 서남쪽에 있는 세 개의 산봉우리이고, 이수란 주천의 물줄기가 남경에 와서 두 줄기로 갈라져 그 사이에 백로주를 끼고 흐른다는 뜻으로, 이수삼산이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했다.

 그러나 강바닥 경사가 급해 토사의 유출이 심한 태화강에서 퇴적된 토사로 그 바다는 메워지고 산봉우리만 들판에 우뚝 남았다. 일제시대인 1931년에는 삼산들에 비행장을 닦아 일본 후쿠오카와 정기여객 항공편을 열기도 하였는데, 태평양전쟁 때 군용비행장으로 확장하면서 삼산의 봉우리들을 모두 깎아버렸다. 그리고 광복 후 비행장이 폐쇄되자 다시 마을을 이루었다. 삼산들의 동편 대부분은 염전이었으나, 염전이 폐지된 후에는 갈대가 무성하여 게가 많이 밀생하였다.

 삼산들과 이웃한 왕새이들은 달동 앞 들판을 말하는데, 왕새이들과 삼산들을 합치니 마당처럼 너르고 편평하다 하여 "마당들"이라고 불렀다.

 이수삼산에서 삼산은 사라지고 태화강과 동천의 이수만 아직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삼봉 주위의 바다는 육지가 되고, 봉우리는 절토되어 비행장 활주로로, 다시 삼산들로 논이 되었다가, 지금은 천지가 개벽하여 현대식 버스터미널과 백화점, 종합병원, 금융기관 등 높이 솟은 빌딩들이 삼봉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울산의 신흥 신시가지로서 인구가 밀집한 대단위 아파트와 교통, 유통, 금융산업의 중심번화가로 변해버렸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아직도 삼산이 존재하고 있어 해죽림(海竹林)으로 울창하게 덮여있다면 그 존재이유 하나만으로도 남쪽의 유성화학단지, 석유화학산업단지, 용연중공업단지, 온산국가산업단지로부터 바람에 실려오는 유해한 공기를 차단하는 방풍림으로서 울산시민들을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없는 아름다운 삼산 삼봉의 빈자리가 새삼 허전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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