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염포는 조선시대 부산포·제포(창원)와 함께 왜(倭)와의 교역을 위한 삼포의 하나였다. 현재 엄청난 물동량을 자랑하는 국제항인 울산항으로 성장하기 이전의 근세까지도 조선수군의 군사기지로, 또 일본에 대한 개항지로서 정벌과 회유와 교린의 역사무대에서 중요한 국제항 역할을 해왔다.

 세종 초(1419년) 왜구토벌 이후 교통두절로 고통을 받던 대마도 사람들은 곡식은 말할 것도 없고 생선도 부족하고 소금도 부족했으므로, 세종8년(1426) 대마도주의 청에 의하여 삼포의 왜관에 왜인 60명을 한정하여 개항을 허가하였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1471)에 삼포왜란 당시 왜관의 규모는 36호 120명 정도였다고 한다.

 염포동은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삼한시대 변진 24개국 가운데 하나인 염해국(苒海國)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조선 태종17년(1417년)에는 수군만호를 두었다. 염포동 중리(中里)마을과 성내(城內)마을은 염포영성(鹽浦營城)의 중심 마을이었으며, 아직도 성터가 남아있다.

 염포동의 중리는 바로 왜관이 있었던 곳이다. 신전(新田)은 새 장터라 하여 삼포개항 당시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역사적인 지역으로 일본상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현재 고려화학 본관 건물과 그 주변지역이다. 염포동은 현재 마골산 쪽으로는 주택가를 이루고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현대자동차공장의 시설과 수출부두가 들어서 있다.

 큰 가마솥에 바닷물을 넣고 화목으로 다려 소금을 만들던 가마솥을 염분(鹽盆)이라 하여 염분동(리)이라는 지명이 붙었고, 소금을 거래하던 곳에 염점(鹽店), 염포(鹽浦)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염해국의 "염(苒)을 엄(奄)으로 보아 은 크다는 뜻이니 염포는 대포(大浦)의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소금은 해안에서 생산되었으나 내륙지방으로 수송하는데 교통수단이 빈약했던 옛날에는 중량이 큰 소금의 운반은 어려운 일이어서 소금장수얘기가 많이 나온다. 큰 고개가 험로였던지 전국에 염치(鹽峙)라는 지명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쁜 것을 쫓는데 소금을 뿌리는 풍습이 있다.

 소금은 동물의 핏속에서 전해질로서 각종 양분을 교환하는 데에 필수적인 물질이다. 소금은 인체에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식료일 뿐 아니라 조미료, 방부제, 공업용 원료로 그 용도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소금이 산출되는 지역은 소금의 생산 분배기능과 함께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소금은 무슬림 세계가 처음으로 해상을 탐험하도록 하고, 콜롬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도록 한 활력의 동인이자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삼포에 거류하던 왜인들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교만해지고 난폭한 행동으로 자주 조정의 명을 어겼다.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황형(黃衡)을 보내 석전선수(石戰選手)들인 돌팔매질의 달인들을 선봉에 내세워 크게 이겨 난을 진압했다. 일본은 사과하고 다시 개항을 간청하므로, 제포와 부산포는 열어주었으나 염포는 좌병영의 기밀을 지킬 목적도 있고 하여 이후로는 영영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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