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기름먹인 노란색 부채를 아세요. 손잡이 위쪽에 검정 종이로 박쥐무늬를 오려 붙인 커다란 방구부채 말입니다. 선풍기도 귀하던 시절에 여름의 필수품이었지요. 바람도 너풀너풀 넉넉하게 풀어내고 무엇보다 오래 쓸 수 있었습니다. 사라져버린 그 노란색 부채가 골목 식당의 식탁위에 하나씩 놓여 있습니다. 주인은 정부시책에 따라 에어컨의 온도를 조금 높이는 대신 이 부채를 특별히 주문했다고 합니다.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옛 사람들은 부채를 여덟 가지 덕을 지니고 있다하여 팔덕선(八德扇)이라 했습니다. 부채를 쓰임인 용(用)이 아니라 인격을 부여한 덕(德)이라 했으니 부채의 효용 가치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바람을 일으키는 맑은 덕은 기본이요 햇빛을 가리거나 비를 피하는 덕도 지녔습니다. 파리나 모기를 쫓아주기도 합니다. 이것저것을 가리키는 지시봉으로도 그만이지요. 가끔 앉을 수 있는 깔개도 되어 주고 빚쟁이를 만났을 때 얼굴도 가려주며 무엇보다 헤져서 버려도 아깝지 않으니 그 덕이 놀라울 뿐입니다.

부채는 드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합니다. 국립국악원에서 박동진 명창의 흥보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발림(몸짓)에서 부채는 별별 역할을 다 했습니다. 제비가 되어 하늘을 날고 박을 써는 톱이 되는가 하면 흥부가 매품을 팔 때는 후리치는 매가 되었습니다. 자진모리 중 놀보 심술대목에선 부채를 힘 있게 확 펼치더니 순식간에 부챗살이 접히기도 했습니다. 이어지는 아니리 부분에서는 접은 부채를 받쳐 들고 흥건한 육담을 펼쳤지요. 세기의 명창도 부채가 없다면 맛깔스런 소리 결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갈공명이 어디 힘으로 조조의 군대를 물리쳤나요. 부채를 들고 상하 좌우로 진두지휘를 한 덕분이지요. 한국적 색채가 잘 드러나는 군무는 단연 부채춤입니다. 무당도 손에 부채를 들어야 작두도 타고 잡귀도 내 쫓습니다. 영화 ‘색,계’에서 탕웨이가 들고 있던 까만 부채, 그녀는 그 부채 하나로 관능미를 한껏 과시했습니다.

여름이 정점을 찍었습니다. 조금만 인내하면 남쪽에서 건들마가 불어올 것입니다. 선선한 바람이 건들건들 옷소매를 파고들면 바로 가을의 시작입니다. 팔덕선도 펼쳤던 덕을 더위와 함께 접어 몸을 낮출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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