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리(嵋湖里)는 본래 경북 경주시 외남면 지역이었는데, 고종 광무 10년(1906)에 울산의 두서면에 편입되었다. 일제 때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음동·중동·하동을 병합하여 미호천의 이름을 따서 미호리라 이름하였다.

 두서면의 "두(斗)"는 마루꼭대기라는 뜻에서 연유됐다. 곡식의 양을 재는 말로 생각하여 "두산(斗山)"이 되기도 하였고, 달리는 말로 생각하여 "마산(馬山)"이 되기도 했다. "두서(斗西)"는 꼭대기의 서쪽이라는 뜻이고, "두동(斗東)"은 꼭대기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풍광이 수려한 미호저수지 북서쪽에는 천마산이 있다. 이 산기슭에 하얀색 병(甁)이 나타나는 바위가 있어 이것으로 사람의 생사운명을 미리 알 수 있다고 전한다.

 고려 중엽의 일이다. 이 바위 부근에 어떤 승려가 절을 지어 기거했다. 어느 날 시주를 받으려고 마을로 내려가 어떤 집에 이르러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청하니, 집주인은 자기가 몇 살까지 살 수 있겠느냐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자기는 점을 치는 사람이 아니라 불도를 닦는 승려라고 답하자, 주인은 시주를 못하겠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라고 면박을 주었다. 또 다른 집에서는 자기 주인 양반이 병중인데 언제쯤 쾌차하겠느냐고 물어 모른다고 하자 그냥 문을 닫아 버렸다.

 스님은 어이없어 하며 절로 돌아왔다. 골똘히 사색에 빠져있던 그는 문득 부처님의 영검을 받아 해탈하여 인간의 생사를 판가름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정과 망치로 절 옆에 있는 큰 바위를 다듬기 시작했다. 불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백일기도를 할 작정이었다.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손에서 피가 흘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염불을 외며 바위를 다듬어 불상을 완성했다. 그 돌부처 앞에서 기도를 드린 지 마침내 99일 째가 되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꼭 백 날이 되는 데, 그때 갑자기 돌풍이 몰아쳐 스님은 바위 밑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동자승에게 "내가 죽으면 이 바위에 하얀 병 모양의 돌이 생길 것이니, 너는 그것을 보고 사람의 운명을 판단해 주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부처를 새긴 바위 한 쪽에 하얀 병 모양의 돌이 나타났다. 그 하얀 병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백일기도에 하루가 부족하기에 하루치 앞날만을 알 수 있다 했다. 구전에 의하면 도승이 백일 기도를 마쳤더라면 백년 운수를 예측할 수 있었으리라고 한다.

 젊은이들의 인생 길을 가르는 대학입학 수능시험이 끝났다. 전국의 기도원이나 도량에 몰려들었던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의 미래가 걸린 수능결과가 얼마나 궁금할까.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