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바구니에 담긴 늦사리 물외 몇 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등 굽은 모습이 애잔합니다.

“저도 사는 게 몸에 부쳤는지 이 할망구처럼 등이 꾸부러졌구만”

난전의 할머니는 여위고 볼품없는 상품을 파는 것이 미안했는지 한마디 하십니다. 초여름 미끈하고 통실한 오사리 물외를 팔 때는 아마 굽었던 허리도 좍 펴지는 기분이었을 테지요. 철지나 핀 노란 외꽃은 쭈뼛쭈뼛 얼마나 망설였을까요. 제 껍질을 부서뜨리고 힘겹게 꽃을 밀어 올리고 보니 태양은 한풀 꺾였고 밤바람은 찬 기운을 뿜어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열매를 달 욕심으로 몸을 불뚝 내밀고 보니 홀로 키워내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본 나는 압니다. 그럼 알다마다요. 가느다란 다리로 버티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말입니다. 태생이 부실한 끝물 물외는 짙푸른 철봉에 매달려 단물을 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입니다. 자라는 동안 바람도 한 삼태기 포기 사이로 지나가 주기를, 비님도 자주 다녀가기를 바라며 꿋꿋하게 제 몸을 키웠을 테지요.

밥줄을 붙잡고 사는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잡은 줄이 동아줄처럼 튼튼하기를 말입니다. 힘껏 붙잡고서 절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그 시간을 견디느라 화도 내고 다툼도 있지만 어느새 수굿해져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물외처럼 홀로 매달리는 일은 제 속을 숙부드럽게 하여 성숙에 이르는 길입니다.

매달리는 것들은 꼭지부분이 약이 올라 짙은 색을 띱니다. 맛도 농후하지요. 고추는 꼭지 쪽이 유독 맵습니다. 반질거리는 보라색 가지도 윗부분은 진하고 단단하여 뚝 떼어 내고 요리를 합니다. 애호박도 꼭지는 솥뚜껑 팬에 기름 두르는 용도로 요긴하게 쓰입니다. 꼭지 떨어져 땅위를 구르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입니다. 그러니 늦사리 물외가 등이 좀 굽었기로 뭐 그리 대수겠어요. 물외의 껍질을 벗깁니다.

겉모습과 달리 하얀 속살이 부드럽습니다. 맛도 달큼합니다. 야멸차게 더웠던 지난여름을 아쉬워하며 냉국을 만듭니다. 청량고추도 다져 넣습니다. 쓴맛의 꼭지 부분을 버리지 않고 곱게 채를 쳐서 함께 넣습니다. 그 맛이야말로 늦사리 물외의 존재 증명이니까요. 물외 냉국을 한 그릇 마시고 물외한인(物外閑人)으로 유유자적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매달리지 않으니 떨어질 염려도 없겠지요.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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