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성묫길에 손바닥을 베었습니다. 봄날의 여리고 고운 풀이 유치원생 키만큼 자라 칼이 될 줄이야. 피가 삐죽이 나오는데 참 난감했습니다. 망각도 병인가 봅니다. 지난해에도 방심하다 손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여름 뙤약볕을 받아 단단히 약이 올랐던 것이지요. 풀잎도 칼이 된다는 사실을 매번 잊어버립니다.

어머니는 풀치조림을 자주 했습니다. 풀치는 갈치의 새끼입니다. 새끼갈치를 꾸덕하게 말려 살짝 튀긴 다음 갖은 양념을 넣어 조리면 입에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이지요. 가시를 발라내지 않고 그대로 바싹하게 씹어 먹을 수 있어 더 좋았습니다. 그 풀치가 자라 갈(칼)치가 됩니다. 생선가게에 지느러미를 좍 펼치고 길게 누워있는 갈치는 번쩍이는 칼입니다. 갈치를 먹다가 뼈가 목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밤새 괴로워하다가 이튿날 결국 병원에 가서야 해결을 했습니다. 다른데도 아니고 칼끝이 목을 겨냥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한 이틀 목이 부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풀이 자라 날카로운 칼이 된다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품에 쏙 들어오던 자식은 사춘기만 되어도 부모의 가슴에 콕콕 칼날을 들이댑니다. 꽃 각시에 꽃 낭군이었던 보드라운 사람도 세월을 무기삼아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숙성되고 익어가는 사이사이에도 칼은 숨어있나 봅니다. 봄나물이 되어주던 풀은 여름날의 천둥과 폭풍우를 견디면서 날을 세웁니다. 부드러운 뼈로 칼슘을 듬뿍 공급해주던 풀치도 짠 바닷물 속에서 칼이 될 수밖에 없나봅니다.

제주산 갈치가 육 만원이란 이름표를 달고 오만하게 누워있을 때 은빛이 아니라 금빛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몸값이 잘 벼린 칼처럼 무섭기도 해서 살까 말까 수없이 망설였습니다. 요즈음 그 칼이 빛을 잃었습니다. 일본의 방사능 오염문제로 말입니다. 값은 내렸지만 멀찍이 보고 지나칩니다. 박물관 유리장안에 길게 누워 있는 녹슨 청동 칼을 볼 때처럼 감흥이 없습니다. 슥 만져보았을 뿐인데 남의 손바닥을 사정없이 죽 그어대던 풀도 가을이 지나면 스러지고 맙니다. 사람살이 또한 그러합니다.

나도 한때 풀과 꽃이었으며 품안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다 비바람을 이겨내려고 칼을 품고 살았지요. 생각 없이 칼을 휘둘러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제 내 칼날은 무디고 이가 빠져 풀도 베지 못합니다. 더 낭패스러운 일은 녹슨 칼로는 치렁치렁한 문장을 단칼에 벨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애달픈 일입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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