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밤을 까는 저녁입니다. 산속에서 알밤 벌어지는 나직한 소리를 알기에 음악도 자연을 품은 소리를 고릅니다. 꽃 피우던 유월의 기운과 무시로 찾아들던 벌떼들의 군무, 황금햇살을 뒤집어쓰고 인내한 나날들입니다. 때죽나무와 물푸레나무, 그리고 청미래덩굴이랑 주고받은 숲의 언어들이며 나뭇잎을 스쳐 지나는 빗소리도 내재되어 여물었기에 알과 밤인 알밤이 되었습니다.

알밤의 껍질을 벗기려면 평상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어설픈 칼질로는 그 단단한 가죽옷을 벗겨 낼 수가 없습니다. 가시로 무장한 집을 뚫고 나왔기에 나 또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칼끝으로 머리 쪽을 ‘툭’ 쳐서 일격을 가합니다. 그렇게 기를 누른 다음 손가락과 손목에 힘을 주어 천천히 겉옷을 한 겹 벗겨냅니다.

윤기 도는 겉껍질을 벗기면 보늬가 나옵니다. 어감과는 달리 우툴두툴한 것이 보푸라기까지 있습니다. 하긴 제 속살을 들키지 않으려고 껍질에 단단히 붙어 굳건한 의지를 보였으니 매끈한 비단이나 보드레한 질감의 속옷은 당치 않지요. 보늬는 본의(本衣)입니다. 본래의 옷인 내피를 벗겨내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온갖 벌레소리를 머금어 몸을 푹 싸안았을 테니까요. 쓱쓱 깎아 훌렁 벗겨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알밤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깎아 놓은 밤톨 같다’는 말은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둥글게 돌려 깎아야 할 곳과 각을 세워야 할 곳은 다릅니다. 첫날밤 새색시 옷을 벗기듯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하얀 속살이야말로 알밤의 본질이니까요.

옷을 다 벗은 알밤이 그릇 안에 오보록이 모여 있습니다. 무결점 몸매입니다. 한 톨을 집어서 깨물어 봅니다. 오도독 씹히는 맛에 희열을 느낍니다. 알밤을 세는 단위가 ‘톨’이라는 것은 참 좋습니다. 밤이나 곡식의 낱알을 세는 단위가 ‘개’나 ‘손’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톨’이라야만 허투루 쓰지 않을 것입니다. 겉옷이며 속옷까지 벗은 알밤들은 몸 보시를 합니다. 잔칫상이나 명절 상차림에 알밤이 빠지면 본데없는 상것들의 음식이 됩니다. 알밤은 그렇게 끝까지 품위를 지킵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알밤답다’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내 안의 애증후박(愛憎厚薄)을 둥글게 도려내고 칼끝으로 쳐내어 맨몸이 되고 싶습니다. 알밤을 닮고 싶은 가을입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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