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종이상자를 무심히 열다 흠칫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섭니다. 아! 쭈뼛쭈뼛 온 몸에 도깨비 뿔을 단 감자들이 나를 노려봅니다.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걸어 나와 시위라도 할 태세입니다. ‘여태 무얼 했니, 도대체 나를 어쩔 셈이야’ 아우성을 칩니다. 캄캄한 어둠속에도 서러움은 때론 힘이 되나 봅니다. 제 몸에 뿌리박고서 왕성하게 싹을 키우는 감자를 보니 가슴이 싸 합니다.

창고 문을 가끔 여닫곤 했지요. 그러나 구석진 곳의 상자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태양이 적도에서 가장 북쪽으로 올라간 하지점에 머물 때 캔 감자를 입동이 지나도록 버려두었습니다. 아니 까맣게 잊었습니다. 너무 오래 잊힌데 대한 분노는 순한 몸에 마침내 푸른 독을 품고 말았습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숨죽이며 제 몸을 키워낸 것들은 눈을 숨기고 있다 여차하면 싹을 힘껏 밀어 올립니다. 눈을 부릅뜨다 기어코 뿔을 세우기도 합니다. 어디든 닿고 싶어 하는 그 질긴 삶을 나는 깡그리 무시했습니다. 사람들도 가까운 이들에게 외면을 당하면 고슴도치처럼 온 몸에 가시가 돋습니다. 제 기운을 주체 못하는 부룩송아지 같은 아이들은 엉덩이에 뿔이 나기도 하지요. 분별력을 잃고 이해와 타산을 구별 못해 가끔 머리에도 뿔이 납니다. 그 뿔로 번식기의 수사슴처럼 피가 나도록 격렬하게 받고 받히며 싸웁니다. 감자의 싹처럼 제 영역을 넓히려는 본능이겠지요.

감자의 싹을 자릅니다. 그 주변의 독성을 깊이 파서 제거합니다. 칼을 잡은 내 손은 떨리고 마음은 아픕니다. 하지 무렵 탱글탱글하던 감자의 몸뚱이는 사방에 뿔이 돋은 대신 쭈그렁이가 되었습니다. 싹을 키워 냈으니 물기 빠진 빈 등걸이 된 셈이지요. 고랑 같은 주름에 버석하게 마른 어머님의 얼굴을 볼 때처럼 아릿합니다. 그 아린 감자를 굽고 찌고 볶고 조립니다. 무한변신의 감자는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 양분이 되는 소임을 해 내고 말았습니다. 까맣게 어둔 곳에서의 수백 번의 발길질이 헛발질은 아니었습니다. 감자전을 한입 베어 뭅니다. 내 배 속에서 감자 꽃이 흔흔하게 피는 느낌입니다.

어둠속에 남게 된다면 두드려야 합니다. 창이든 마음이든 별이든 꽃이 되었든 힘차게 두드려 봐야 합니다. 수천 번의 발길질도 마다하면 안 됩니다. 괜히 온 몸에 멍 자국을 내며 도깨비 뿔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둥근 감자 한 알이 그렇게 부탁을 합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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