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리(九英里)는 일정 아래인 1914년, 구영(舊營)이라는 한자로 된 이름이 본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는 구영(九英)으로 바뀐 마을이다.

 신라 때 굴화현(울산고을)의 병영(兵營)이 있어 그 유래를 따른 뜻 깊은 지명인데 일제가 우리의 정신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개명한 사례이다. 구영(舊營)과 구영(九英)은 같은 소리이긴 하나 뜻은 매우 다르다. 역사적 사실이 담긴 이름에서 가벼운 의미의 지명으로 돌변했다. 일제가 행정구역 변경을 빌미로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조선 영조때 울산도호부사 윤지태가 어느 날 민정을 살피러 나섰다. 사또의 행차가 태화(太和)말랑이에 이르렀을 때에 길가에 옹기 짐 하나가 넘어져서 박살이 나 있었고 그 옆에 한 늙은이가 주저앉아 탄식을 하고 있었다. 구영리의 점촌(店村) 또는 점동(店洞)은 옹기점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 점동마을에서 옹기를 지고 울산장으로 오던 길에 짐을 받쳐놓고 잠시 쉬고 있을 때 별안간 회오리바람이 불어 옹기 짐이 넘어져서 깨어지고 만 것이다. 사또는 그 늙은이가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부하를 시켜 그를 동헌으로 나오게 하고는 다시 어부 가운데 넉넉하게 잘 사는 두 사람을 골라 같은 시간에 불러오도록 하였다.

 윤부사는 두 어부에게 어제 그 시각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고 물었다. 한사람은 고기를 잡아 포구에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고기 잡으러 나가는 시간이었다고 대답하였다. 윤부사는 다시, 그러면 그 때 배에 돛을 달았느냐고 물었고 두 어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윤부사는 한 어부는 동풍을 빌어 돌아왔으며 다른 한 어부는 동시에 서풍을 빌어 바람을 타고 바다로 나아간 것이니, 이것이 서로 엇갈려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옹기장수의 옹기를 박살낸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어부에게 부서진 옹기에 대해 각기 닷냥씩을 변상하여 주라고 판결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명판결이라 감탄하였다 한다.

 흔히 회오리바람은 양쪽에서 갑자기 서로 반대방향으로 강한 바람이 불어 돌면서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상식의 함정이다. 기상학자들은 일정지점의 공기가 갑자기 데워져서 그 데워진 공기가 불쑥 하늘로 치솟아 오를 때, 그 사이를 둘레의 찬 공기가 빙글빙글 돌면서 바람이 올라가고 다시 그곳으로 흘러든 공기까지 데워져서 하늘로 솟구치게 되는데 이것이 회오리바람이라고 한다.

 윤부사의 번뜩이는 기지(機智)가 엿보이는 "명판결"은 오늘날의 발달된 과학 때문에 "오판"인 것으로 되었다.

 비록 과학적인 지식은 오늘의 우리보다 못할 수도 있으나, 목민관으로서 모든 백성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빛난다. 그가 한층 돋보이는 것은 법제와 형벌로 강제하는 대신 덕과 예를 갖추어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자존심 강한 울산사람들을 제대로 다스리는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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