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서약국 마루에는 가을이면 구절초가 걸리곤 했습니다. 꽃, 잎, 줄기, 뿌리까지 통째로 말라가는 곳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렸습니다. 약국에서는 온갖 한약재 냄새가 났지만 구절초향기만큼은 특별했습니다. 서약국의 주인장인 이모부는 여자들에게 최고의 명약이라며 하얀 밥공기에 뜨거운 물을 따르고 꽃을 띄워 차를 만들어 주곤 했습니다.

산청의 구형왕릉이 있는 왕산의 언덕배기도 가을이 불꽃처럼 타오릅니다. 왕릉을 지키는 은행나무도 질세라 금관이 되어 빛을 뿜어냅니다. 낙동강 변에서 화려한 철기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는 사라져 버린 왕국입니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 그의 능은 만산홍엽 속에서도 애달프기만 합니다. 11년간 왕으로 재위하다 신라의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준 그 심중을 헤아려 봅니다.

구형왕릉은 돌무덤입니다. 경사진 언덕에 석단을 만들어 돌로 쌓은 무덤은 피라미드를 연상하게 합니다. 왕릉의 낮은 돌담을 돌다가 구절초를 보았습니다. 돌 틈서리에 핀 한 더미의 꽃을 하마터면 지나칠 뻔 했지요. 가느다란 허리에 새하얀 얼굴을 내밀고 ‘나 여기 있소’ 낮게 말을 걸었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어머니의 마음 같다하여 선모초(仙母草)라 하였습니다. 그 자애로움으로 왕릉의 발치에 피어 그윽이 올려다봅니다. 한 나라를 통째로 신라에게 바친 구구절절한 사연을 알고 있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구석진 도린곁에 피었습니다. 왕에게도 위로가 필요 할 것 같아 구절초 한 송이 꺾어 석단에 가만히 올립니다.

음력 9월9일 즉 9가 두 번 겹치는 중양절(重陽節)에는 줄기가 아홉 마디가 자라고 그때 채취한 것이 약효가 제일 좋다고 하여 구절초(句節草)라 부릅니다. 인내와 희생으로 묵묵히 살아온 어머니를 닮은 선모초는 많은 딸들과 또 그 딸들에게 뜨끈하게 속을 데우는 약재가 되었을 테지요. 어머니도 가을이면 구절초 꽃을 따기 위해 한나절을 걸려 버스를 타고 깊은 산으로 가곤 했습니다. 그 꽃을 잘 말려 딸들의 베갯속을 만들었습니다. 꽃베개를 만들던 어머니도 꽃차를 우려 주시던 멋쟁이 이모부도 가고 없는데 구절초 향기는 쌉싸래하게 다가옵니다.

구형왕릉을 내려옵니다. 늦가을 추위에 가야의 역사처럼 스러질 구절초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봅니다. 꽃은 나라 잃은 지아비를 가슴 시리게 바라보았던 한 여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절초 꽃차 한 잔을 어머니요 딸이기도 한 비운의 왕비에게 올리고 싶습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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