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미자 춘해보건대학교 교수·요가과

거울을 보라. 어느 날 턱을 만지다 제법 길게 자란 한 올의 털을 발견했다. 민망스럽고도 충격적이었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도 제대로 나의 얼굴을 본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았다고 여길 뿐 시간을 가지고 성의를 다해 나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어디 얼굴뿐이겠는가. 주위의 일상적인 모습은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눈여겨 본적이 없는 것으로 수두룩하지 않은가.

헬렌켈러는 자신이 만약 대학총장이라면 학생들에게 ‘눈을 사용하는 법(How to use your eyes)’을 필수과목으로 정하여 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겠다고 한 적이 있다. 보는 대상을 더 잘 알기 위해 분명 제대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하리라.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더 많은 것을 보려한다. 한그루 나무를 본다고 할 경우, 스쳐지나가듯이 본 후 나무를 보았다고 말하리라. 나무에 관하여 자신의 생각을 본 것으로 착각하여 말할지도 모르겠다. 헬렌켈러는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나무가 가지는 냄새,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 바람에 의해 스치는 나뭇잎 소리 등을 눈으로 본 사람보다 더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헬렌켈러가 더 잘 본 것이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게 되면, 가능한 나와 전혀 다른 문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생동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는 적어도 습관적으로 늘 보던 대로 보지 않기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보는 것에 조금이라도 호기심과 정성이 담겨져 있다는 의미다. 정성을 기울일 때, 지금 현재에 나의 의식이 머문다. 영어로 현재(present)는 다른 의미로 선물을 뜻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것은 하나의 선물이며, 요가철학에서는 요가의 본질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나의 시선이 곧 삶이며, 요가인 것이다.

인도의 성자 오쇼는 현대인은 자신이 되어가지 않고 눈이 되어간다고 하였다. 보는 자보다는 보여지는 외적인 대상에 온통 주의를 빼앗겨 눈을 통해 보고 있는 감각 너머의 자신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리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보는 자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보는 것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채 봐야 한다. 익숙하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 선입견으로 보기 때문이리라. 어떤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고요하게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새롭지 않을까. 창의성은 가장 익숙한 것을 가장 낯설게 보는 법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 순간을 선물로 여기고 싶다면, 한 번도 보지 않은 것처럼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아야 하리라.

곽미자 춘해보건대학교 교수·요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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