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신문 1면에 난 김장 적정시기 예상도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러 개의 곡선이 그려져 있고 무와 배추도 아래 쪽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네요. 지도에 따르면 울산은 12월 중순이 알맞은 시기입니다.

본 김장을 하기 두 주일 전쯤에 가을무를 고춧가루와 젓국에 버무려 먹는 무 섞박지가 있습니다. 오래두고 먹는 김치가 아니라 김장하기 전 입맛을 돋우는 김치지요. 가을무는 산삼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밭에서 금방 뽑아온 무로 섞박지를 담급니다. 무를 숭덩숭덩 썰어 소금에 절인다음 찹쌀 풀을 끓여 만든 김치 양념을 고루 섞어 사나흘 익히면 아작아작 씹히는 맛이 일품이지요.

“다리가 왜무시(왜무) 맨키로 기럭지만 길쭉해서 어디다 쓰노 내사 마 그 처녀는 싫다.”

오빠의 색싯감을 보고 온 외숙모는 다리는 조선무처럼 튼실해야 아기도 쑥쑥 낳아 기르고 하는 일이 쉽게 풀린다고 했습니다. 왜무는 수분이 많고 길쭉한 개량종 무를 말합니다.

“왜무시야 밍밍한 단무지나 만들지 쓸 데가 없는 기라. 맛있기로야 대평무시가 제일이지”

옆에서 이모까지 거들고 나섰습니다. 결혼 조건이 다리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의아했습니다. 하긴 우리 동네 대평무는 자태도 실하지만 맛 또한 정평이 나서 값도 후했으니까요.

땅기운을 머금은 무는 엉덩이 부분이 둥그스름하고 미끈하여 꽤나 육감적입니다. 그냥 보기에도 ‘품질보증’ 이란 마크가 꾹 찍힌 조선무입니다. 그것으로 무국이며 무생채도 만들고 무청을 넣어 물김치도 담급니다. 무나물은 달착지근하게 맛나고 무조림은 은근히 구미가 당깁니다. 가을무는 뭘 해도 보약입니다.

잘 익은 섞박지는 뽀얀 곰탕 국물과 환상의 궁합을 이룹니다. 섞박지를 먹으니 외숙모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긴 다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단박에 사람의 숙성정도를 알아 낼 수 있었기에 괜히 다리 핑계를 댄 것이지요. 조선무랑 왜무는 생김새 못지않게 쓰임새나 맛도 완전히 다르니까요. 섞박지가 제대로 맛을 내려면 양념이랑 조화롭게 섞여야 하듯이 내 식구랑 무난하게 어우러질 끌끌한 처녀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집 온 새색시가 김장 서른 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된다는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마흔 번도 넘게 김장을 한, 머리에 허옇게 서리가 내린 이 땅의 어머니들은 맛깔스러운 김치로 세상을 품습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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