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로 "집을 짓는다"는 의미를 지닌 바우하우스(Bauhaus)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고등 조형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합쳐서 창설한 대학수준의 교육기관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그는 대부분의 기존 건축들이 그리스-로마 양식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대해 회의하고, 건축은 조형미술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예술가와 공예가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를 없애고 두 집단사이의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통하여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창조하자는 의도를 실현하고자 했다. 바우하우스는 독일 건축사에 있어서 변혁의 바람을 불게 한 거대한 사건인 셈이다.

 그렇다. 알프스 계곡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통나무집이 있고, 황량한 이베리아 반도에는 붉은 색 토담집이 있으며, 바람과 돌이 많은 제주도에는 지붕이 완만하고 키 낮은 돌담집이 존재해왔다. 각각의 건축은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위대한 고안물이다. 그러나 21세기 건축물에는 기능적 요소는 물론 미적 요소가 필수적으로 개입되어야 한다. 그것은 시멘트와 철근으로만 꾸며진 도시에서 인간은 행복하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낙후된 영역 중 건축도 빼놓을 수 없다. 근대화를 도모한답시고 전국을 통일적으로 주황색, 감색 지붕으로 바꿔버리고 도시계획 과정에서 지방색, 전통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등 정치적 파괴행위를 지속해온 결과 아무런 특징도, 방향도 없는 시멘트 공화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건축 면에서만큼은 근대화나 도시화 계획이 우리를 보다 구시대적, 전근대적 상황으로 몰아넣은 셈이다.

 우리 건축물에 대해 바우하우스에서처럼 조형미를 논하는 것은 아예 무의미하다. 기본적인 기능 차원에서도 우리의 건축수준은 매우 저급하다. 창문은 바람과 추위를 막고 바깥의 소음을 막을 수 있어야만 할텐데 과연 우리의 창문들이 그런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 건물의 벽은 건물자체를 지탱하고 공간 구분을 가능하게 하여 사용자의 독립적 공간을 확보해 주고 행복한 삶의 조건이 되어야 할텐데 과연 그런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건축양식이 없다는 사실이다. 전 국토에 골고루 퍼져있는 갖가지 형태의 레스토랑·여관 건물은 세계에 유래가 없는 건축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상호들 또한 노르웨이니 네덜란드니 하여 실체와 외형 모두가 패러디 문화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실체 없는 패러디는 자원(資源)도 되지 못할뿐더러 문화형성의 동기도 되지 못한다.

 농촌에 들어서고 있는 가옥들 또한 농촌 실정에 맞지 않을뿐더러 주위 환경과의 조화면에서도 어설프기 그지없다. 업자들의 마케팅이 정책을 앞질러 가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제 돈 들여 제 집 짓는다 해도 그 집들이 모여 우리 농촌의 경치와 현실을 만들어간다면 정책이 개입되어 바람직한 도로, 상하수도, 주택으로 유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 좋은 예가 "조립식 주택"이다. 경비와 공기(工期)면에서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농촌 실정에 맞는지, 장차 환경문제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지, 주거자의 건강에 위협요인이 되지는 않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설령 모든 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외관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 농촌 모습에 가장 어울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문적이고 정책적으로 따져봐야만 할 주제이다.

 그럴만한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한국 건축가들이 무수히 많지 않은가.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에 예술성이 뛰어난 몇 개 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뭐 그리 대단한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작품 또는 예술로서의 건축은 일상적 삶의 수준으로까지 연계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환경과 삶에 가장 적합한 건축양식 창조라는 의무에 있어서 그들은 태만해 왔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와 세계적 규모의 건축물을 지어왔지만 건축과 건축물에 담아야 할 문화와 철학은 빼먹고 있었던 셈이다. 하루빨리 한국건축에도 국립 바우하우스의 건축이념과 같은 고민들이 배여 나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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