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매화가 가을 국화 용하게도 추위를 침범해 피니

 경박한 봄꽃들이 이미 간여하지 못하는데

 이 꽃이 있어 더구나 사계절을 오로지 하고 있으니

 한때에만 치우치게 고운 것들이야 견디어 볼 만한 것이 없구나" 최자의 〈보한집〉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에 봄이 왔음을 안다. 매화를 보는 것은 마음을 열고 봄을 맞는 일이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일주일 쯤 빨리 매화가 피었다. 날씨가 정말 따뜻했던 모양이다.

 매화가 필 때쯤이면 으레 멀리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홍쌍리씨의 청매실농원을 그리워했는데 이제 울산에서 멀지 않은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 영포마을이 있어 든든하다. 울산에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매화가 그득 피어있으니. 솔직히 영포마을이 청매실마을 보다 훨씬 더 "매화마을"답다. 청매실마을이 산능선 한자락을 차지하는 것에 비해 영포마을은 가운데 도로를 두고 있는 골짜기 이편저편이 온통 매화로 뒤덮인다.

 지난 주말을 앞두고 영포마을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화 피었어요?" "만개했습니다" 벌써 만개라니. 마음이 바쁘다. 철 따라 꽃을 보러 가는 여행은 문화유산답사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맛기행에 못지 않게 가슴이 설렌다. 새 계절이 기다리고 있다가 와락 달려드는 느낌이랄까, 성장을 하고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만나는 기쁨이랄까.

 양산시내를 벗어나 원동 방면으로 꼬불꼬불 산길로 20㎞ 쯤, 화제리를 지나 삼정지에 이르니 벌써 매화가 산자락을 덮었다. 배내골 방향으로 다시 10㎞ 영포마을에 이른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마치 가로수처럼 하얀 매화가 줄지어 서있다. 나무 키가 더 크면 터널이 되었을 텐데. 그 정도는 아니다.

 다행히 매화는 70% 쯤 피었다. 다가오는 주말쯤 절정에 이를 듯하다. 영포마을의 매화는 백매, 청매, 홍매가 고루 섞여 있다. 세 종류의 매화를 이렇게 선명하게 구분해 볼 수 있는 것도 기쁨이다. 지금 만개한 꽃은 거의 백매화다. 햇빛 잘드는 곳에 선 홍매도 꽃을 피웠으나 아직 봉오리을 붉게 머금고 있는 게 더 많다. 청매도 거의 피지 않았다.도로 아래로 멀리 매화가 산자락을 덮었다. 도로 위로 올라서면 눈맛이 더 좋다. 산 위로도 멀리까지 매화로 뒤덮였다. 매화향이 정말 그윽하다.

 "매화는 정조와 충절, 군자 등의 상징성을 지녔는데,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특히 본받고자 했던 덕목들이었다. 그리고 매화의 청정미와 그윽한 향기는 선인들의 취향에 너무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즉 매화에는 우리 민족이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적인 것"의 본질이 축약돼 있었던 것이다."

 최근 〈매화〉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 전내무부장관 이상희씨가 말한 매화의 매력이다.

 원동에서 역시 빠뜨릴 수 없는 볼거리가 영포마을을 지나 1㎞를 채 안가서 자리한 신흥사다. 너른 마당, 깨끗한 요사채, 인적이 끊긴 적요, 그 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맛배지붕의 대광전. 보물 1120호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 대광전은 서툰 덧칠이 안된 원래 모습 그대로다. 단정하게 제 모습만 갖추었을 뿐이다. 법당안에 들어서면 천장과 벽에 칠해진 단청이 너무나 아름답다. 500여년을 이어온 색채에 깊이 스며든 세월의 더께가 더럽기는커녕 너무나 진실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영포마을에 이르기 전 도로가에서 팻말을 만날 수 있는 용주사라는 절도 한번 들어가 볼만한다. 절집은 볼품없고 앞이 턱 막혀 있으나 석불(보물 147호)이 아름답다. 눈동자를 그려놓고 입술도 발갛게 만들어 놓은 것이 못내 거슬리기는 하나 얼굴이나 몸통이 섬세하고 당당하다. 배례석도 화려하다. 절로 내려서는 길이 하도 가파른데다 그 끝에 낙동강이 자리하고 있어 마치 절이 강 속에 있는 건 아닐까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런데 막상 절집에 당도하면 앞이 철길 방음벽으로 꽉 막혀있어 맥이 풀리는 아쉬움이 있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에도 매화가 한창이다. 지난 9일부터 오는 23일까지 매화축제가 열린다. 정명숙기자 jms@ksilbo.co.kr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