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들꽃학습원~모래골~길천마을~모래골~들꽃학습원
(암향부동(暗香浮動) : 그윽한 향기가 은근히 떠돎 )

모래골로 접어들면
맑은 개울 중심으로
논과 밭이 이어져 있어
푸르른 흙냄새·꽃향기 물씬

자연이 빚어낸 남근석
시비 늘어선 시와 노래가 있는길
악기가 되는 나무교육장

꽃·새·바람이 친구가 되어
힐링의 시간 선사

4월의 들판이
생명의 꿈틀거림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다.
물을 가득 가둔 논에서는
향기로운 흙냄새가
온 들판으로 퍼져 나가고
야산에는 이제 막 연달래가
나비같은 분홍빛 꽃잎을 펼치고 있다.
암향부동(暗香浮動) 4월의 들판은
하루도 놓치기 아깝다.
문밖을 나서는 자체가 봄여행이요,
산야를 걷는 자체가 힐링인 계절이
바로 지금이다.

▲ 들꽃학습원 인근 모래골에서 입화산 방면으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 능선을 이어 나가는 길이다. 한가롭고 정겨운 등산로에는 꽃과 새와 바람이 친구가 되어 줘 시종 심심할 틈이 없다. 이곳에는 지금 연달래와 함께 개벚꽃이 한창이다.
울산 울주군 범서읍 서사리 들꽃학습원에 주차를 하고 모래골로 접어들면 4월의 들판이 향기롭게 펼쳐져 있다. 맑은 개울을 중심으로 양쪽에 논과 밭이 물결같은 곡선을 그리며 다정하게 누워 있고, 논밭 가운데 곳곳에 핀 꽃들이 폭죽처럼 방점을 찍고 있다. 무논에서 파릇파릇 돋아 오르는 풀들과 갈아 엎어 놓은 논밭에서 퍼져 나가는 흙 냄새가 대지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모래골 입구에서 한 5분 한가로운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오른쪽에 입화산 방면으로 안내하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들판을 가로질러 야산 기슭에 도달하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등산로가 숨은 길을 내어 준다.

 
등산로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연달래. 진달래가 질 즈음에 피는 이 꽃은 고혹적인 분홍색을 띠고 있어 등산객들의 발걸음을 잡는다.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지만 연달래는 잎과 꽃이 함께 핀다. 푸른 잎 사이로 분홍색 꽃이 피어 있으니 정열적인 진달래와는 또 다른 은은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움은 독을 품고 있다고 했는데, 연달래 역시 꽃잎에 독성이 있다.

입화산 방면으로 가는 등산로는 꼬불꼬불 능선을 따라 제 스스로 길을 이어나간다. 초보 등산객들은 얼마나 빨리 멀리 가느냐에 신경쓰지만, 내공이 쌓이면 그저 산에 듦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높은 곳으로 오르기 보다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고 산을 이기기 보다는 산에 안기기를 좋아한다.

얼만큼 걸었다 싶을 때 문득 만나는 기묘한 물건이 있다. 사람 키를 넘는 큰 바위가 남근의 모양을 그대로 닮아 있어 지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어떤 이가 그 바위에 ‘세계 최대 남근’이라고 적어 놓아 웃음을 자아낸다. 석공이 쪼아낸 것도 아닌데 너무나 정교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 시와 노래가 있는 길 표지석.
능선을 따라가던 길이 갑자기 몸을 일으킨다. 제법 숨이 차게 언덕을 올라서면 나무 교육장이 나온다. 공중에 매단 나무의 길이에 따라 이를 칠 때 나는 소리가 각각 달라지는데, 간단한 연주까지도 가능해 신기함을 더한다.

언덕을 내려서면 이제부터는 시비(詩碑)가 양 옆으로 도열한 ‘시와 노래가 있는 길’이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시비는 울산 시인 최일성씨의 ‘매화’다.

‘송이 마다/결백한 바람으로/꽃피우더니/어느 순수가 머물다 갔기에/달빛 마다 향기가 스미는가/적막으로 자란 귀에/천상의 소리 하나/길러내더니/이밤/첫 눈 내리는 교교한 소리’

▲ 나무 교육장.
이 밖에도 김춘수의 ‘꽃’, 김소월의 ‘진달래꽃’, 서덕출의 ‘눈꽃송이’, 유안진의 ‘가을편지’, 울산출신 박영식 시인의 ‘신록’, 울산출신 박종해 시인의 ‘빈병’, 고복수의 ‘짝사랑’, 박목월의 ‘나그네’ 등 주옥같은 시들이 단단한 화강암에 절대 지워지지 않는 명문(銘文)으로 찍혀 있다.

명시는 읊을수록 더 새롭다. 뻔히 아는 시를 새롭게 읊으며 ‘시와 노래가 있는 길’을 걸어가노라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 모두 속세를 떠나 있다.

▲ 남근석.
길은 한가롭게 길촌 방면으로 이어진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이지만 인적이 뜸해 고요하고, 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온다. 길촌 마을로 가면 논밭의 풍경이 또 하나의 그림이다.

길촌 마을에는 가든이 많다. 시간이 허락하면 길촌마을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른쪽으로 난 모래골 방면 하산길로 접어들면 된다.

하산길 왼쪽에는 조그만 실개천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주민들이 경작하는 밭에 각종 묘목과 작물들이 한창 잎을 밀어내고 있다. 고요한 봄날 오후 인적없는 산골에 진달래 붉은 꽃잎이 아직도 영롱한데, 멀리서 피끓는 두견새 소리가 들린다. 두견새가 토한 피로 물들여진 꽃이 두견화(진달래)라고 했던가.

하산길 끝에는 어여뿐 원두막이 기다리고 있다. 원두막에 앉아 앞산을 바라 보니 새로 돋아나는 잎 때문에 산 전체가 푸르게 보였다가 또 뿌옇게 보였다가 한다.

▲ 시비(詩碑).
문득 아까 보았던 박영식 시인의 시비에 새겨진 시 ‘신록’이 생각나 읊조려 본다.

뻐꾸기 목청 다듬어
들썩이는 짙은 숲속

푸드득 깃을 치며
일어나는 초록 바람

물소리
돌베개 삼아
청산가(靑山歌)를 듣는다

글·그림=이재명기자 jmlee@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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