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이야기를 입히다-스토리텔링 울산 : 69.이봉석 장로와 울산양육원

해방후 귀환동포 먹고 잘곳 없어 고생하자 사회사업 시작
한국전쟁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불우아동돕기 재단 설립
‘남을 돕고 받드는 주춧돌 되겠다’ 봉석(奉石)으로 개명
달동 300평 YMCA에 기증…달동 강남교회 부지도 기증
이옥주 여사의 내조·공무원 윤진백 장로의 지원도 큰 힘

지난 4월 10일 울산YMCA가 북구 진장동에서 창립 40주년 행사를 갖고 그동안 울산YMCA 발전을 위해 일한 많은 전현직 직원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 40여 년 전 울산YMCA 초석을 다지기 위해 달동의 금싸라기 땅 300여평을 내어 놓았던 이봉석 장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 이봉석 장로(둘째줄 왼쪽 세번째)가 70년대 후반 자신의 생일을 맞아 달동 양육원에서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옥주 권사가 이 장로 옆 오른편에 초록색 한복을 입고 앉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불우아동들을 돌보는 복지단체가 생겨난 것은 1950년 한국동란이 일어나면서다. 이때부터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을 돌보기 위한 고아원들이 각지에 설립되어 미국원조 물자로 운영되었다.

이봉석 장로는 울산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가장 먼저 불우아동들을 돕기 위한 재단을 설립했던 인물이다. 그것도 한국전쟁 전에는 정부와 미군의 도움 없이 순전히 사재를 털어 오갈 데 없는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이 장로가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재단을 설립한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다.

해방이 되어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으로 끌려간 귀환동포들이 고향을 찾아 울산으로 오자 이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돌보기 위해 재단을 건립한 것이 그가 사회사업을 벌이게 된 시초다.

처음 양육원을 건립한 곳이 달동 울산비행장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달동에 일본육군항공대를 만들어 놓고 만주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해 돌아가면서 이곳에 있었던 비행장 건물들을 버리고 갔는데 이 장로는 이 건물들을 인수해 오갈 데 없는 귀환동포와 고아들을 수용했다.  

▲ 일제강점기 비행장이 있었던 달동의 옛 울산양육원 자리에 들어선 33층의 동문아뮤티 주상복합건물의 모습.

그가 이런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 만주로 가 이미 개간사업을 벌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3년 웅촌 곡천마을에서 출생했던 이 장로는 어린 시절을 우정동에서 보내었는데 본적이 지금도 우정동 193번지로 되어 있다.

그가 왜 만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만주로 갈 때 이미 결혼했고 그곳에서 수리조합 일을 하면서 농경지를 개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을 맞아 울산으로 온 그는 만주의 경험을 살려 처음에는 수리조합 일을 했는데 이 무렵 울산에 온 귀환동포들이 먹고 잘 곳이 없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사회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울산에 온 귀환 동포들은 현 신정동 한국은행 울산본부 자리와 중구 계비고개 일대에 천막을 쳐 놓고 살았지만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해 대부분 거지 행세를 하면서 살아야 했다.

이 장로가 이들을 위한 구호사업을 펼칠 계획을 세우고 울산군청으로부터 정식 양육원 인가를 받은 것이 1946년 8월이었다. 이 장로가 이때 이들을 돕기 위한 결심을 얼마나 굳게 했나 하는 것은 그의 개명에서 알 수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이 종석(鐘錫)이었으나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는 ‘남을 돕고 받드는 주춧돌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이름을 ‘봉석(奉石)’으로 바꾸었고 평생 이 이름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았다.

당시 그가 부딪혔던 가장 힘든 일이 원생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다. 그 때만 해도 우리 사회는 물론이고 정부조차 고아들을 돌볼 형편이 되지 않아 재단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순전히 이 장로 혼자 부담해야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날마다 울산군청과 울산읍사무소 직원들을 만나 지원을 요청하고 지역유지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그의 평생 친구가 되는 윤진백 장로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윤 장로는 당시 울산읍 공무원으로 근무했는데 이 장로가 양육원을 운영하는 동안 행정 지원은 물론이고 물질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둘은 이후 울산제일교회 장로로 같이 시무하면서 기독교 복음화운동에 동참하는 등 평생 친구로 지냈다. 둘은 나이로는 동연배였지만 말을 할 때는 항상 서로 존칭어를 사용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90년대까지 울산YMCA 이사를 지냈던 윤원석씨(64)가 윤 장로의 장남이다.

한국동란 후 전쟁고아들이 울산으로 몰려들면서 이 장로는 더욱 바빠졌다. 갑자기 늘어난 원생들을 보살피느라 더욱 힘들었던 그는 이 때부터 미군 구호물자와 교회의 도움을 받았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미군 구호물자를 많이 받기 위해서는 미군들과 의사가 통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재단 실무자로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앉혔다. 오추수씨가 사무장이 되어 울산양육원 일을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영어 스피치는 물론이고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울산양육원에서 오랫동안 일한 후 나중에 부산으로 가 소정교회 장로가 되었다.

이 장로는 자신이 장로로 시무했던 울산제일교회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는 고아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이들의 장래를 위해 교육까지 시켰다. 교육도 의무교육만 시킨 것이 아니고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재능이 있는 어린이들은 대학까지 보내었다.

양육원을 운영하는 동안 자연재난도 여러번 당했다. 특히 1959년 9월 한반도를 덮친 사라호 태풍으로 원사가 완전히 수몰되는 바람에 강남초등학교 뒤편에 원사 1동을 새로 지어 옮겨야 했다. 처음 양육원이 있었던 달동에는 현재 33층의 동문아뮤티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이 장로는 1974년 울산YMCA 초대 이사장이 되면서 이 땅 300여평을 울산YMCA에 기증했다. 이 땅은 나중에 삼산지역이 개발되면서 값이 천정부지로 솟아 현재 진장동에 있는 5층 울산YMCA 건물을 새로 짓는 종자돈이 되었다.

기독교 정신으로 사랑과 봉사를 실천했던 그는 교회 건립에도 땅을 내어 놓았다. 현재 달동에 있는 강남교회도 1958년 1월 그가 250평의 땅을 헌납해 지어질 수 있었다. 이 땅은 당초 배밭이었는데 이 장로가 배밭 중 일부를 구입해 강남교회에 기부했다.

중앙유치원 초대 원장을 지내기도 했던 이 장로는 5·16 후에는 재건학교 교장이 되어 울산의 불우 청소년들에게 학업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 장로는 이처럼 사회사업을 위해 개인 재산을 많이 내어 놓았지만 정작 자신의 생활은 근면 검소했다. 그가 종교인으로, 사회사업가로 모범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부인 이옥주 권사의 내조가 컸다. 이 장로는 원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연탄공장을 운영하고 양계업을 벌이고 직조공장도 했는데 이 때 내조로 고생했던 사람이 이 권사였다.

이 권사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부산 동래여고의 전신인 일신여고를 졸업한 신여성이었다. 그는 이 장로가 양육원을 운영하기 전에는 제일교회가 옥교동에 세웠던 중앙교회 유치원 보모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 장로가 양육원을 시작하면서 보모 자리를 그만두고 양육원 일에 매달려야 했다.

이 권사는 양육원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이 권사로 일했던 제일교회는 물론이고 울산의 다른 교회와 사회단체에서 큰 행사를 하면 행사 후 남은 음식물들을 가져와 원생들을 먹였다. 당시 이 권사는 이들 음식물을 항상 큰 구제품 가죽가방에 가득 넣어 머리에 이고 먼 길을 걸어 와야 했는데도 이를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생들의 이발도 이 장로와 이 권사가 직접 했다. 이 장로가 이발기로 원생들의 머리를 깎고 나면 이 권사가 가위로 원생들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손질해 주었다.

이 권사는 1985년 이 장로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동안 이 장로가 했던 일까지 맡아야 했다. 이 권사는 1990년에는 무거동에 새 건물을 지어 양육원을 옮기는 등 큰 일들을 해 내었다. 원생들을 5남 2녀의 자녀들과 함께 먹이고 입히면서 키웠던 이 권사는 사회사업을 하는 동안 상도 많이 받았다. 2002년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선정한 제38회 ‘용신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울산양육원은 2007년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로 옮겨 이 장로의 네째 며느리 김영숙씨가 올해 새 원장으로 취임했고 장남 영재씨(74)가 이사장으로 있다. 영재씨는 울산농고를 거쳐 서울 문리대 사회학과를 졸업, 청와대 민정비서실과 정무비서실에서 근무했고 우석 이후락 선생이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는 보좌관으로도 활동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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