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일보와 나’ 공모 ‘동상’ 당선작

▲ 천성현

내가 처음 ‘경상일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간을 앞두고 학성동 바오로 병원옆 건물에 임시 사무실을 열고 윤전기를 들여 놓을 때부터다. 당시 나는 그 건물에 있는 직장에서 사회 첫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러기에 오며가며 신문 창간의 과정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25년, 경상일보와 나는 같은 나이를 먹고 울산이라는 한 지붕을 이고 살았다. 지금 우리 지역 언론을 선도하는 성년의 경상일보가 될 동안 나는 과연 무엇을 했는지 자문해 본다. 그렇지만 경상일보를 통해 나는 내 인생에 있어 참으로 의미 있는 일 하나를 했다.

1993년 5월로 기억한다. 경상일보에 ‘마음밭 독서회’라는 책읽기 동호회가 소개된 적이 있다. 울산에서 책읽기를 좋아하는 동호인들이 모여 독서회를 매월 개최한다는 기사를 보고난 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회원으로 가입했다. 독서회가 열리는 날마다 선배 회원들의 다독에 놀랐고 같은 책을 보고도 각각 다른 시각의 독서 평을 듣고 있노라면 참 배울 것이 많은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 분들을 따라 잡기 위해 더 열심히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7년간을 매달 한차례씩 독서토론을 하면서 익힌 습관과 트레이닝은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는 좋은 인생의 지식 자양분이 되고 있다. 지금도 나는 아침이면 경상일보를 뒤적이면서 그날의 그 독서회를 찾고 있다.

대한민국이 IMF때 졸지에 직장을 읽은 중년들이 넘쳐났다. 나도 그 위기로 인해 실업의 나락에서 처음에는 매일 밤낮으로 술을 마셨다. 술을 더 이상 마실 수 없다는 신체의 신호가 오기까지 술독에 빠져 살았다. 병원에서 며칠 간 입원치료를 받고 금주와 운동을 권유 받았다. 매일 아침 새벽에 산으로 오르면서 대체 내게 온 지금의 실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깊은 시름으로 빠져 들었다.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실업을 자각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정마저 무너져 가고 있었다. 아내는 매일 아침 신문 오기를 기다리는 내 꼴이 보기가 싫어서 신문사 지국에 신문사절을 통보해 버렸다. 신문 활자의 금단증상은 연인과의 이별과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자꾸만 생각나고 아침이면 기다려지고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방관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배신감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신산했던 실업의 시대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도서관이었다. 아침이면 도서관에 갔다. 그곳에서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조간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서는 경상일보에 난 사진 동정란을 살펴보았다. 내 동기 누구는 시의원이 되어 또는 유지가 되어 웃는 사진을 보며 빨리 세상을 향해 배를 저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경상일보를 통해 나는 세상과 교류했고, 방향성을 모색했다. 어디에 새로운 일자리가 있을지 파악하기도 하고, 기사를 통해 공연이나 강연을 들으러 가기도 했다. 이는 스마트폰의 범람으로 인해 종이 신문의 설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는 추세에서도 지역을 대표하는 일간지 경상일보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역신문을 읽는 것이 곧 울산에 사는 시민이 지불해야 할 월세라고 생각한다.

천성현 울산시 중구 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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