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유학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커서 힘든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연구실 문을 열어놓고 학생들에게 거의 개방하다시피 하니 학생들이 복도나 연구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조교실에 들려 이야기하는데 내가 연구실에 있으면 학생들 소리가 늘 들리게 마련이다.

 학생들이 조교실에 와서 질문을 한다거나 때로는 학생들끼리 마주칠 경우 반가워서 명랑하게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등 모든 것이 명랑하고 생기있어 좋기도 하지만 방해를 받기도 했다. 어떤 때는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싶어 참아보기도 여러번 했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나에게는 소음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일상 생활 속에서 공중 목욕탕에 가보면 정말 심하다할 정도가 한 두번이 아니다. 굳이 지방을 따진다면 사투리가 갖고 있는 억양도 소리가 큰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밖에도 우리들의 가정에서도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틀어 놓는 텔레비전 소리와 아파트 밖에는 자동차 소리 등 잠시도 쉬지 못하는 우리들의 귀가 불쌍하기도 하다.

 그런데 나 역시 지금 어느 정도 익숙해져 웬만한 큰소리에도 놀라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종종 산이나 들에 가서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가 그립고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곤 한다.

 그래서 문득 약 2년전 독일의 발도르프 유치원에 연수차 견학해서 경험한 것이 생각난다. 나는 일주일동안 매일 약 4시간 정도 방문하면서 아이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 곳 유치원에서 만 3세와 5세 사이 약 25명의 아이들이 자유활동을 하는 동안 크게 소리치는 아이가 없었고, 특히 간식시간에 아이들은 선생님으로부터 나누어 받은 죽을 먹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나의 눈과 귀를 의심했을 정도다. 아이들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안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순간적으로 약간은 질식할 분위기로 받아들였다. 아마도 아이들이 교사의 권위 때문에 즉 타의에 의해 떠들고 싶은 것을 억누르 있어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었나 싶어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진지하게 간식을 먹으면서 자기 옆 사람하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아이들은 벌써 공동생활에 필요한 남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배인 듯했다. 그래서 이야기는 하지만 남을 방해하거나 자기만을 주장하는 듯 큰소리를 내지 않고 옆 친구가 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 곳 유치원은 한창 말배우는 시기이지만 우선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중요시하고 남에게 방해되지 않게끔 목소리를 조종하는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물론 이런 생활 습관은 이미 대부분 가정에서 배우는 것이다. 즉 아이들은 가정에서 성인의 행위를 보고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에서 가정교육과 유아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이미 어렸을 때 훈련된 습관에 의해 대중이 이용하는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직업상 유아들의 교육현장을 자주 방문한다. 그래서 아동들의 점심시간을 종종 곤찰하곤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면 아동들이 먹고 있는 것인지 친구들과 노는 것인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이들의 명랑함이 너무 지나쳐 수선스럽다.

 우리는 너무 많은 소음에서 자라기 때문인지 아니면 목소리가 커야 자기 말이 남에게 전달되는지 여하튼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면서 성장하는 듯하다. 또한 공공장소에 목소리가 큰 것을 나무라는 부모를 나는 아직 목격하지 못해 아쉽다. 도대체 주위 환경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나 외에 주위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의 생활 습관 탓인지 여하튼 공공장소에서 남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삶을 사는 우리 모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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