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소유했느냐가 기준되는 한국
도덕적 가치로 판단하는 외국과 차이
삶의 질 높이는 사회적 풍토 조성해야

▲ 곽미자 춘해보건대학교 요가과 교수

지난 6월에 현대경제연구원에서는 전국 성인 남녀 81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여 ‘당신은 중산층입니까?’라는 제목으로 흥미로운 보고서를 발표했다. 국민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중산층의 모습은 매달 515만원을 벌어 341만원을 쓰고, 35평짜리 주택을 포함하여 6억6000만원 상당의 순자산을 보유하며, 매달 12만원 상당의 외식을 네 차례 즐기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위해 소득의 2.5%를 기부후원하고 무료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한편 SBS에서 방송 중인 <매직아이>라는 프로그램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중산층 기준은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하고 월 급여는 500만원 이상이며, 자동차는 2000cc급 중형차를 소유하고 예금액 잔고 1억원 이상 보유와 해외여행 1년에 한 차례 이상 다니는 것이다.

이들 두 자료에 의하면 공통되는 특징이 있다. 중산층의 기준이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즉 경제적인 요소를 수량화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중산층의 기준을 경제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다른 국가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가진 것을 총동원하여 중산층에 포함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외국의 경우라 해서 경제적인 요소가 포함되지 않겠느냐마는 우리보다는 도덕적, 정신적 가치가 확연히 두드러진다. 인상적인 것은 프랑스의 퐁피두 전 대통령이 제시한 중산층의 기준이다. 외국어 하나쯤 자유롭게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하고, 스포츠를 즐기거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접대를 할 줄 알며, 사회 정의가 흔들릴 때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나설 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퐁피두 전 대통령은 1974년도에 서거하였으니 이 기준을 언급한 것은 그 이전임에 틀림없다. 4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러한 기준이 제시될 수 있을지 궁금하지만 중산층의 의미는 경제적인 소유와 별개로 여유로운 삶의 질을 다루었던 것 같다. 현대경제연구원의 보고서에도 분명 여유로운 생활과 삶의 질을 다루고 있다. 다만 삶의 질이라는 항목에 월 생활비와 외식 횟수, 회당 외식비용을 기준으로 삼고 있어 여유로운 삶마저도 경제적인 양적 측면에만 국한시키고 있다.

삶의 질마저 경제적으로 수치를 매기고 그 수치를 객관화시키는 것처럼 여겨져 무엇을 중산층의 기준으로 삼아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저것 고민해보지만 자신만의 삶에 대한 철학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가진 것이 적어도 행복할 수 있는 철학, 많은 것을 가진 자를 만나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철학, 소유하지 않아도 풍요로울 수 있는 여유이다. 햇살과 바람을 소유할 수는 없으나 즐길 수 있다면,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풍요로울 수 있는 사람을 중산층의 기준으로 삼으면 어떨까?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이고 사랑스럽게 자신을 볼 수 있다면, 그 사랑으로 이웃을 배려할 줄 알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하면 어떨까?

내친 김에 상류층의 기준까지 정해보자.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의 행복과 건강에 보탬이 되고 그 일에 몰입할 수 있다면, 바른 생활습관으로 건강수명을 기대수명과 같게 할 수 있다면,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 않고 나이 들수록 정신과 육체가 더 아름다워진다면, 죽을 때는 어느 시인처럼 이 세상의 소풍은 참 아름다웠노라고 여길 수 있다면, 강물이 이름과 형상을 버리고 바다와 하나가 되듯이, 자아의 한계가 사라져 무한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상류층 중의 상류층이리라.

그렇다면 빈곤층은 어떠할까? 많은 것을 가져도 행복할 줄 모르는 이, 악을 행하고도 그것이 나쁜 줄을 모르는 이들을 빈곤층의 기준으로 삼으면 어떨까? 어느 경제학자는 현실의 중산층은 설문조사에 나타난 이상적인 중산층의 기준보다 못하며, 그 이유는 미래의 노후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한다. 이 또한 노후대책을 경제적인 것으로만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의 질을 위한다면 자신만의 중산층 기준을 정하여 삶의 의미를 고려해보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한 사회적 풍토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곽미자 춘해보건대학교 요가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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