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이장우와 이후락

진하 만석꾼 이규현의 손주로
우석 이후락이 외 5촌 아저씨

몸집이 크면서 과묵한 성격으로
우석이 대통령 비서실장 됐을때부터
최측근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롯데를 새마을 운동에 참여시키고
울산실내체육관 건립 기금 마련 등
고향 울산의 발전에 힘보태
친인척 인사청탁도 철저히 배제

울산에는 이장우 중앙정보부 비서실장, 정택락 이후락 청와대비서실장 비서, 이동철 육영회 회장 등 우석 이후락이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 때 그를 모셨던 사람들이 많다. 이들 중 이장우씨는 우석을 가장 지근에서 도우면서 그림자 역할을 했다.

1927년 서생에서 태어났던 장우씨는 우석 보다 3살 아래다. 장우씨 집안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전후해 울산 최고 부자였던 서생의 만석군 집안이다. 촌수로는 만석 살림을 이룬 이규현씨가 이씨의 큰 할아버지가 되지만 장우씨의 아버지 종로씨가 이규현씨의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장우씨 집안이 물려 받은 재산이 많았다. 

▲ 이장우 전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은 유년시절 집안이 부유해 진하에서 1000여평이 넘는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외 5촌 아저씨 이후락을 따라 서울로 간 후에는 이 집에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도 비어 있는 이 집은 이후락이 군 생활을 할 때 자주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1932년 동아일보는 특집에서 ‘이근수는 이규현의 장남으로 서생어업조합장을 지낸 후 농촌 개발에 힘쓰면서 동생 종로와 함께 가산을 일구는 일에 전력을 쏟고 있다’고 근수씨와 종로씨를 소개하고 있다.

현재 진하에는 종로씨가 살았던 1천여 평의 집이 그대로 있다. 종로씨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동아일보 울산지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촌수로는 우석의 4촌 누나 인지씨가 종로씨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우석은 장우씨의 외 5촌 아저씨가 된다. 이런 인연으로 우석은 어릴 때부터 진하의 장우씨 집을 자주 찾았다. 특히 우석이 군에 있을 때는 휴가를 오면 반드시 장우씨 집에 며칠씩 머물다 돌아가곤 했다.

우석이 장우씨를 눈여겨 본 때가 이 무렵이다. 장우씨는 학창시절에는 운동을 열심히 해 몸집이 크면서 단단했고 성격이 과묵해 그가 눈을 한번 부라리면 동료들조차 무서워했다.

대구에서 중고등학교을 마친 그는 군 생활을 우석과 함께 했다. 중앙대학을 졸업했던 그는 장교로 입대했는데 이때 우석도 장교였다. 이후 우석이 미국 유학을 떠나자 그는 육군대위로 예편해 집안일을 도왔다.

그에게 행운이 온 것은 우석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면서다. 미국에서 돌아온 우석은 1961년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1963년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우석의 최측근이 되어 우석이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우석이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을 때 청와대 비서실 행정관으로 일했던 그는 1970년 우석이 주일대사로 갈 때는 대사 1급 보좌관으로 우석을 따라 일본으로 갔다.

이후 우석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영전하자 그는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이 되어 정부종합청사에 사무실을 두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가 고향 울산을 위해 한 가장 큰 일이 롯데를 새마을 운동에 참여시킨 것이었다. 일본을 갔다 오던 중 비행장에서 신격호 회장을 만났던 그는 신 회장에게 울산의 새마을 운동에 적극 동참할 것을 권했고 이후 신 회장이 시멘트를 울산에 많이 보내어 울산 새마을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1973년 울산실내체육관 건립추진위가 결성되었을 때는 박영출 상공회의소 회장, 손영길 수도경비사 부사령관과 함께 부회장직을 맡아 체육관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힘썼다.

중정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는 이후락 실장의 방북과 유신선포, 김대중 납치사건 등 각종 대형 사건이 많이 터지면서 위험한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8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던 고향 후배 최형우씨를 우석에게 인사시켰던 그는 유신 때는 최형우씨와 악연을 맺기도 했다. 이씨의 주선으로 최형우씨는 안가에서 우석을 만나게 되는데 이 때 최 의원을 본 우석이 “국회가 이렇게 시끄러워 오래 가겠습니까”하고 말했는데 이 말이 적중해 8대 국회는 일 년도 가지 못해 유신이 선포되면서 해산되었다.

최의원은 5공화국 때 김영삼씨가 대통령 직선제를 내세우면서 단식을 할 때 이 안가를 한 번 더 들리게 된다. 당시 노신영 안기부 장관은 최씨를 이 안가로 부른 후 미국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1972년 우석이 박 대통령의 밀사로 평양에 갈 때도 이씨가 동행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나 하는 것은 우석이 청산가리를 몰래 호주머니에 넣어 갔다는데서 알 수 있다. 이 때 이씨의 집은 합정동에 있었고 그가 부인과 헤어져 살았기 때문에 집안일은 이씨의 고모 이말선 여사(78·진하노인회 회장)가 돌보았다.

이 여사는 “평소 장우는 성격이 과묵해 말을 잘 하지 않았는데 평양으로 가는 날은 아침에 나를 부르더니 ‘고모 제가 오늘 나가면 일주일 정도 있다가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내 방을 잘 치워 놓고 집을 잘 지키세요’라고 하면서 집을 떠났는데 그때 장우가 이후락과 함께 평양으로 가는 줄을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회상한다.

유신은 그에게 악역을 강요했다. 특히 유신이 일어났을 때 울산 야당 정치인들이 유신 반대에 앞장서면서 중정으로 잡혀오게 되는데 당시 그와 울산 정치인들의 관계는 최형우 자서전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에 잘 나타나 있다.

“중정에서 조사를 받은 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서둘러 이장우를 찾아갔다. 나는 이장우를 만나자마자 하소연 하듯, 그러나 단호히 얘기했다. ‘나는 앞으로 우리나라 정치가 어떻게 될지 모르오. 이것으로 내 정치생명이 끝날지도 모르고, 그러나 생각해 보시오. 당신이나 나나 다 울산사람 아니오. 고향사람을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오. 이 모든 일을 누가 저질렀는지는 당신이 너무도 잘 알지 않소. 이제는 구속된 동지들을 풀어주시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소.’ 어느덧 내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다소 멋쩍은 듯 그는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그는 겨우 도피중인 이일성과 이영채가 자수해 오면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고 제의했다. 나는 몇 번씩이나 그의 말의 진의를 확인하고 다짐을 받았다. 당대의 세도가 이후락의 비서실장이 확실히 약속을 했으니 믿어보는 수밖에.”

김대중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이 사건이 결국 우석의 발목을 잡았고 그 역시 우석을 따라 비서실장 자리를 내어 놓아야 했다.

윤필용 사건 때도 그는 비애를 느껴야 했다. 윤필용 사건은 우석과 윤필용이 대통령 후계자 문제를 얘기하다가 박 대통령의 분노를 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우석은 중정 내 자신의 사조직을 모두 내 보내어야 했다. 우석의 사조직인 청수회 회장으로 있다가 중정에 들어갔던 김영호씨가 중정의무실장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 이 때다.

1974년에는 울산 출신의 최영근 의원에 이어 한국권투위원회 회장이 되었는데 한국프로복싱은 이때 최 전성기를 맞았다. 홍수환·염동균·유재두 등이 세계 챔피언이 된 때가 이 무렵인데 그는 특히 유재두를 많이 도와 그가 세계 챔피언이 되는데 기여했다.

선거 때면 울산으로 와 교통정리도 했다. 7대 총선 때 우석이 자신의 대리인으로 설두하를 후보로 내세우자 당시 울산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던 이인수 인제치과 원장이 여당 후보 출마를 계획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씨는 자신이 직접 울산으로 와 이 원장을 울산호텔로 불러내어 출마 포기를 종용했다.

그는 권력에 있는 동안 인사 청탁은 철저히 배제했다. 예로 그의 고모 말선씨가 그의 가정부 역할을 끝내고 고향 서생으로 올 때 서생면 보건소에 취직을 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장우씨는 고모인 말선에게 “보건소 직원은 환자들에게 주사를 놓아야 하는데 주사를 잘못 놓으면 환자가 죽고 환자가 죽으면 감옥에 가야 하니 고모가 보건소 직원이 되려면 정식 보건 공부를 해 자격증을 가져야 한다”면서 단호히 거절했다. 고모 이씨는 이 말을 들을 때 섭섭했지만 한편으로 장우가 올바른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울산으로 온 후 정식 간호원 과정을 마친 후 나중에 서생면 보건소 직원이 되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여사는 이와 관련 “당시 진하에는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장우의 친인척들이 많았는데도 아무도 취직을 시켜주지 않았다”면서 “서울의 고위 층 인사들 중에도 그에게 인사청탁을 하면 전화로 호통을 치는 일을 집에서 자주 목격했다”고 회상한다.

우석이 중정에서 물러난 후에도 우석을 지켰던 그는 1974년 2월 우석이 신병치료차 영국을 다녀 올 때도 공항에 나가 우석을 맞았다. 그리고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우석과 함께 한 동안 미국에 오랫동안 머물러 국내 언론으로부터 도피성 외유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권좌에 있을 때 장남 상철씨을 앞세웠던 그는 말년을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보내다가 5년 전 별세했다. 그가 태어나고 청소년 시절을 보내었던 진하의 집은 그가 서울로 간 후 지금까지 비어 있는데 가끔 복선씨와 말선씨 등 고모들이 이 집을 돌보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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