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 전인가. 한 미국 청년과 일년 동안 한 지붕 밑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미국 동부의 명문대학에서 비교종교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동양사상에 심취하게 된 그는, 졸업 후 동양의 지혜를 몸으로 체득하고자 아시아로 수행 길에 올랐다. 스리랑카와 일본에서 참선 수행의 이력을 쌓다가 한국에 온 후, 한국에서 출가 승려가 되고 싶다는 뜻을 굳혀가던 즈음 한 의사의 소개로 나와 인연의 줄이 닿았다.  한국어도 배울 겸 일년 정도 같이 있고 싶다는 그의 희망을 받아들여 한 지붕, 한 솥 밥 생활이 시작되었다. 총명과 활짝 열린 감수성을 지닌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미국 문화를 좀더 실감나게 엿보는 동시에 한국을 객관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가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대화. "당신은 한국과 일본 생활을 모두 겪은 셈이니, 두 나라에 대한 감상이 어떤지 궁금하오." "일본 사회는 한국에 비해 월등하게 안정되고 질서 잡혀 있습니다. 그렇게 잘 정돈된 일본에 비해 한국사회는 불편할 정도로 거칠고 어수선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일본에서는 그 안정된 질서 속에서 곧 질식할 것 같은 답답증을 느꼈는데, 한국 사회의 공기를 맡는 순간 그 답답함이 단번에 사라지는 후련한 느낌을 맛보았습니다. 그 때 나는 "아, 나처럼 전혀 새로운 탄생을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한국 땅이 제격이구나!"라고 직감하였지요."  그는 한·일 비교문화론의 중요한 통찰 하나를 꿰뚫고 있었다. 이모저모 따져볼 때일본 사회는 아무래도 일종의 집단 주술이 강하게 작용하는 듯하다. 일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그 집단 의식과 관행으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한다는 일이 매우 어려워 보인다. 집단의 무게에 눌려 자기 실현을 위한 근본적 변신이 힘든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 사회는 상대적으로 일탈과 변화에 과감하다.  한국인들은 과거의 전통이나 현재의 관행에서 비교적 쉽게 몸을 빼는 것 같다. 기존의 틀에 연연하지 않는 해체의 기질과 활력이 선명해 보인다는 말이다. 5백여년을 지속되던 사회 문화적 관행과 저토록 쉽게 결별하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인가. 한국 정치의 저 격렬한 권력 이동과 일본 정치의 관행은 충분히 비교되는 일이 아닌가. "한국 땅에는 무엇인가 엄청난 활력이 넘쳐난다"는 외국인들의 한결같은 감상도 비슷한 맥락에서 음미할 수 있다.  변화에 과감한 활력은 분명 돋보이는 개성이다. 그러나 매사가 그렇듯이 이 개성도상반된 두 얼굴을 지닌다. 보다 나은 수준을 향한 해체와 새로운 질서 수립 능력일 수도 있는 동시에, 충분히 성숙된 질서를 가꾸지 못하는 조급한 파괴 습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릇 모든 변화는 기존의 관행과 질서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기에 변화의몸짓은 언제나 불안을 잉태하고 또 초래한다. 새로운 질서를 위한 관행의 해체는 그렇게 혼란과 불안을 숙명으로 겪는다. 창조적 재탄생의 의지와 자신감이 강한 사람들은 기꺼이 그 변화의 불안을 선택한다. 성숙과 발전을 위해서는 기존의 틀과 관행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과감히 과거와 결별한다. 이 경우 변화의 활력은 새로운 수립을 위한 해체 에너지가 되어 충분히 생산적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진득하고 정성스레 가꾸어 가지 못하는 변덕과 조급증도 외견상 활력 넘치는 변화로 보일 수 있다. 이 경우 그 강한 변화 지향성은 질서를 가꾸어 가지 못하는 경박한 소모적 부정으로 전락해 버린다.  인류사적 과제가 되어 버린 남북 분단의 극복을 향한 한국인의 활력이 어지러운 파장으로 번지고 있다. 지금 연출되는 혼란과 불안은 생산적 해체의 불가피한 대가인가, 아니면 조급하고 들뜬 소모적 파괴의 굉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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