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중구 장충동에 "장충단 공원"이 있다. 서울 남산 북쪽자락에 자리한 작은 도심공원인 장충단 공원의 이름 유래는 그 안에 장충단(奬忠壇)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있기 때문이다. 그 비석은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 당할 때 일인 자객들과 싸우다 숨진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많은 순국자의넋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00년 고종황제가 세운 것이다. 장충단이란 글씨는고종황제의 친필이며 비문은 충정공 민영환이 썼다.  그러나 장충단 공원은 "을미사변"이라는 우리 근대사의 비극적인 배경보다는 가수 배호(1942∼1971)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라는 노래와 함께 추억되는 공간이다. 배호는 1967년 병상에서 이 노래를 처음 불렀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안개 낀 장충단 공원〉 1절)  배호의 노래 속에 나오는 장충단 공원은 아픈 추억의 공간이다. 장충단 공원은 늦가을 안개에 싸여있고 누군가 낙엽송 고목에 젊은 날 새겨 놓은 사랑의 이름을 찾아와 그 글씨를 어루만지는 실루엣이 떠오른다.  이른바 유행가라고 부르는 대중가요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노래를 듣거나 부르다 보면 그 노래에 동감(同感)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노래 가사 속의 주인공 과 같다는 느낌에 빠르게 빠져드는 것이다.  배호의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슬픈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찾아가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이름 하나를 추억하는 가상체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충단 공원은 배호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추억의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본명이 배신웅인 배호는 중국 산동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 1963년 〈두메 산골〉을 불러 가수로 데뷔한 그는 신장염으로 힘들게 투병하면서도 매혹의 저음으로 〈안개 낀 장충단 공원〉과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마지막 잎새〉 〈안녕〉 〈당신〉 등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많은 노래들을 히트시켰다.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300여곡의 노래를 불렀던 그는 죽어 경기도 양주 신세계 공원묘지에 묻혔다.  배호의 노래가 그의 사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불려지는 것은 그가 너무 짧은 생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투병 중에 그가 취입한 노래를 들어 보라! 숨이 차서 가사가 끊어지거나, 힘겹게 힘겹게 박자를 따라가는 "반 박자 느린 슬픔"을 들을 수 있고, 그런 슬픔이 우리를 배호의 노래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배호는 장충단공원이라는 도시적인 공간을 통해 도시인들의 내면적인 우수를 노래했지만 그러나 현실의 장충단 공원에는 항일의 엄격함이 있다. 공원 곳곳에 숨은듯이 서 있는 사명대사, 류관순, 이준 열사, 최현배 선생의 동상에서 항일 정신이 묻어 난다.  그리고 공원 입구에는 조선 세종 때에 만들어진 청계천 다리 중의 하나인 "수표교"가 1958년 청계천이 복개됨에 따라 옮겨져 와있다.  배호의 노래비 하나 서 있지 않고, 노래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 장충단 공원을 만들고 있지만 공원 안에서 배호를 만나기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 사랑의 이름을 새겼던 낙엽송 고목은 여전히 푸른 잎을 달고 있고 아직도 배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 그늘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을 바쁜 사람들이 더욱 바쁜 시간을 사는 비정한 곳으로 읽는다. 그래도 내가 서울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장충단 공원에 가면 서울의 바쁜 시간들이 잠시 숨을 멈추고 앉아 있다.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편안함 사이로 서울사람들이 사랑하는 "장충단 길"이 있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산책길인 그 길에도 배호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다시 한 번 슬픈 사랑의주인공이 되어 그 길을 걷는다.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지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안개 낀 장충단 공원〉 2절)    여행수첩---------------- 장충단공원을 찾아가려면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오면공원입구와 만난다. 장충단 공원에는 배호의 노랫말 속에 나오는 낙엽송들이 많아 가을이면 서울도심에서 황금빛 낙엽을 즐길 수 있다. 장충단 공원 안에는 울산 출신의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동상이 있어 참배하는 것이 좋다.  공원에서 한남동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조금만 걸어가면 건물차체가 건축예술인 국립극장이 있고, 백여 점의 뛰어난 조각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신라호텔 야외조각장도 있다. 공원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인 장충단길도 좋다.  공원 앞인 장충체육관에서 동대문운동장 방면 큰길가 태극당 맞은편에는 10여 곳의족발집들이 "장충동 족발"의 명성을 여전히 자랑하고 있다.  배호〈사진〉는 영원히 살아있는 가수다. 그를 추모하는 인터넷 사이트 www.baeho.com를 클릭하면 배호의 육성과 노래, 다양한 자료들과 지금도 계속되는 배호의 신화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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