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스기야마와 학성여관

1800㎡ 2층 건물로 당시 최대 규모
번화가였던 옛 울산초 앞에 세워져
각종 회합 장소·숙박업소로 각광
초기 주인은 스기야마였는데
해방후엔 정억수-정현무씨 소유로
현재 카페·사무실로 사용중

울산 중구청 2층 복도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서상연 시인이 쓴 ‘그리운 울산’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

이 시에서 서 시인은 ‘지금의 울산교에서 태화강까지는/태화상회 학생사 조양백화점 전광사/정신당시계점 학성여관/대동병원과 상업은행/제재소와 성냥공장도 있었지’라고 해 옛 울산의 풍물을 그림을 그리듯 잘 표현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 울산의 제일 번화가였던 본정통에 자리 잡았던 학성여관은 울산 제일의 여관으로 한국인 유지들이 가끔 이곳에서 회합을 갖거나 부잣집 한량들이 술을 마시곤 했다.

옛날 울산에는 학성여관 외에도 적지 않은 여관이 있었는데 서 시인은 왜 하필 학성여관을 그의 시에 등장시켰을까. 이것은 아마 학성여관이 다른 여관들에 비해 울산시민들의 애환이 깊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울산은 인구에 비해 여관이 많은 도시다. 해방 후까지도 동해의 한촌에 불과했던 울산에 여관이 많이 들어서게 된 것은 60년대 초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되어 건설현장이 많이 생겨나면서다. 이 때 공단건설을 위해 몰려들었던 근로자들이 여관을 찾게 되었고 이처럼 수요가 급증하다보니 여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울산은 여관이 많지 않았고 큰 여관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운영했다.

한국인이 운영했던 여관으로는 해동여관이 구 주리원 백화점 맞은편 골목에 있었다. 이 여관은 이상숙씨 부친이 운영했는데 해방 후 이씨가 이 여관을 동헌 아래로 옮겨 잠시 운영하다가 여관 자리에 명 다방을 세워 한 동안 명 다방이 울산의 문화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울산의 대표적인 일본 여관을 든다면 학성(鶴城)여관, 후지깡(富士屋)여관, 규슈(九州)여관이 있다. 방어진에는 시누끼야(讚岐屋) 여관이 있었다.  

▲ 1917년 울산군이 발행한 <울산안내>에 실린 학성여관 광고.

여관을 이용했던 사람들도 극히 한정되어 일본여관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숙소로 이용되었고 한국인들 중에는 지역 유지들이 가끔 회합을 위해 이용하거나 부잣집 한량들이 술을 마시기 위해 찾았을 정도였다.

당시 여관은 접대부를 고용해 술을 팔았기 때문에 한국인들 중에는 부모를 잘 만나 외지에서 공부하고 온 유학생들이 방학동안 울산에 머물면서 일본 여관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

방어진에도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이 몇 있었는데 시누끼야 여관이 대표적이다. 시누끼야 여관은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사이토오(齊藤實) 등 방어진을 방문했던 총독들이 이 여관에서 잠을 자고 가기도 했다.

후지깡 여관은 성남동 현 신한은행 자리에 있었는데 해방 후 화재로 소실된 후 삼일여관이 들어서 7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후지깡 여관이 언제 들어섰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31년 9월 동아일보를 보면 ‘이 여관에서 60세 가량으로 보이는 노인이 죽어 있는 것을 여관 주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되어 있어 이 여관이 1920대 이미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일여관은 불탔던 후지깡 여관에 비해서는 시설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은 삼일여관의 경우 한옥 가정집 형태로 지어 여관으로 운영했는데 여관이라고 하기에는 시설이 너무 좋지 않았다고 말한다.

규슈여관은 현 중구문화원 건너편에 있었는데 주로 태화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일본 교사들이 많이 이용했다. 1930년대 태화초등학교를 다녔던 이정신 여사(91)는 당시 그의 담임선생이 이 여관에 머물러 점심때가 되면 담임선생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학교를 빠져 나와 이 여관으로 가곤했다고 기억한다.

규슈여관의 경우 주인이 사냥을 좋아해 해방이 될 때까지 주인이 매일 울산 근교에서 사냥을 즐겼는데 해방이 되면서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규슈여관은 규모가 컸던지 울산기자 단례회가 이 여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동아일보 1932년 12월 기사를 보면 ‘울산기자단이 23일 규슈여관에서 망년회를 개최해 신입회원 승인안건을 통과시킨 후 1933년에 벌일 새로운 사업에 대한 협의를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울산을 대표하는 일본여관은 뭐니 뭐니 해도 학성여관이었다. 학성여관은 해방 후에도 오래동안 운영되었다.

학성여관은 일제강점기 당시 울산에서는 제일 번화했던 울산초등학교 앞 ‘본정통(本町通)’에 세워졌는데 여관 건립도 다른 여관에 비해 빨라 울산군이 1917년 발행한 <울산안내>에 광고를 내기도 했다.

광고를 보면 여관 주인은 스기야마였는데 여관이 건립된 지가 100년이 넘었기 때문인지 울산에는 스기야마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없다.

여관은 규모가 커 요즘 중형 호텔급이었다. 2층 건물로 연 면적 1800㎡를 넘어 일제강점기 울산에서는 가장 큰 여관이었다.

건물 길이만 해도 현재 구빙담 찻집에서 네일 숍이 있는 마르앤까지 30m가 넘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신현우 산부인과와 이동훈 X선과 그리고 마로니에 찻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울산안내>에 광고를 실었는데 광고에는 ‘관아 지정여관’이라는 소개와 함께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을 갖추고 맛나는 요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을 정도다. 광고도 울산상업은행 다음으로 커 학성여관의 위세를 보여준다.

시누키야 여관과 당시 울산 최고의 부자 김홍조 옹의 광고도 학성여관과 함께 실려 있는데 이들 광고는 맨 뒷편에 있다.

이런 좋은 시설 때문인지 일제 강점기 이 여관에서는 많은 회합이 개최되었다.

울산비행장 개장식 준비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동아일보는 1928년 11월26일자 기사에서 ‘학성여관 울산비행장 개장식 준비’라는 제목아래 ‘울산비행장 공사가 진행 중인바 12월2일 개장식을 거행할 예정이고 단체 관람자는 11월28일까지 울산면사무소에 단체명, 대표자 이름, 총 인원을 신고하고 관람 위치를 지정 받아야 한다. 그리고 비행기에 대한 설명을 희망하거나 동행자를 원하는 사람은 울산학성여관에 있는 항공중좌에게 신고하면 된다’고 보도하고 있어 울산비행장 개장을 위해 울산에 온 일본인들이 학성여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9년 여름에는 울산에 한해가 들어 농사를 망쳤다. 따라서 울산군이 이해 10월에 거금 8만원을 들여 한해구제를 위한 토목공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때 토목기사들이 모여 공사에 대한 설계를 했던 곳이 이 여관이었다.

이외에도 1933년 5월에는 동아일보 울산지국이 동아일보 조사부장 서춘 선생을 울산으로 초빙해 경제 강연을 듣게 되는데 이 때 울산지역 유지 10여명이 서춘 선생 저녁 대접을 이 여관에서 했고 1939년 11월 무진울산지점 건물이 준공되었을 때 준공식 기념식도 이 여관에서 가졌다.

해방과 함께 스기야마가 떠난 후 이 여관을 인수했던 인물이 정억수씨였다. 정씨는 당시 고기업 울산읍장과 나중에 종하 체육관을 지은 이종하씨와 함께 울산에서는 부자로 통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1986년 이 건물을 현 건물주인 정현무씨에게 팔면서 자신이 해방 후 울산에서는 처음으로 일반 은행 어음을 발행해 사용했다고 자신의 재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차수명 전의원과 최종두 시인이 정씨와 울산초·울산중 동기다.

학성여관은 정씨가 인수한 뒤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6·25로 피난민들이 울산에 몰려들었을 때 여유 방이 없을 정도로 손님이 가득찼고 60~70년대에는 경남 병무청이 신체검사를 울산초등학교에서 하는 바람에 울산에 본적을 둔 입대 예정자들이 신체검사를 위해 울산초등학교에 모여 들면서 이 여관이 다시 차고 넘쳤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경상일보 논설위원

해방 후 학성여관이 가장 번창했던 때가 4대 총선 때였다. 4대 총선에서는 탄광개발로 부자가 되었던 정해영과 김성탁이 울산에서 맞붙었는데 이때 정씨는 학성여관, 김씨는 함양집에 선거본부를 차려 놓고 일전을 벌여 학성여관이 정씨의 선거인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정현무씨는 80년대 중반 울산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 한 채가 1300만원 정도 할 때 정억수씨에게 4억8000만원을 주고 이 건물을 구입했다. 정씨가 이 건물을 구입할 때는 여관 건물이 아니었고 건물 일부가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정씨는 건물을 구입한 후 다방으로 개조해 지금까지 30여 년 간 운영하고 있지만 그동안 중구 상권이 남구로 가는 바람에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

정씨는 최근들어 이 건물 2층은 카페로 아래층은 자신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100년이 넘은 건물이지만 가옥을 지탱했던 뼈대는 아직 건재하다. 정씨는 큰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옛 손님들이 가끔 찾아주는 바람에 욕심 없이 장사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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