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나라 안이 더욱 혼란스럽다. 집안에 어른이 없으면 질서가 잡히지 않듯이 우리가 지금 그 꼴이다. 구심점이 없다. 나만 있고, 너는 없다. 갈등 대립만 있고, 조화와 양보가 없다. 이런 처지에 남도의 대표적인 선비였던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았다. 남명 조식(曺植) 선생은 합천에서 태어 났으나, 김해와 산청의 지리산 기슭에서 살다 가신 분이다.  이 어른의 탄신을 기리기 위하여 진주의 덕산에서 많은 행사도 진행되었다. 그의 사상을 더욱 깊이 조명한 국제학술대회도 그 중 하나였다. 이 대회는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 분야를 새로운 시각으로 규명하려는 국내외의 석학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남명집에 남긴 선생의 〈유두류록〉은 많은 관심을 갖게 하였다. 지금도 지리산 하면 민족의 영산이라 하거니와 이 산자락의 명당에 산천재를 짓고 기거하면서 두류산을 무려 17회나 오르내렸다 한다. 이는 그의 군자적, 선비로서의 기개를 짐작하게 한다. 천왕봉을 오르되 무심하게 오른 것이 아니었다. 뭔가 닮으려 했거나 배울 것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예로부터 군자는 산을 좋아 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500년이지난 지금 흰구름 감싼 지리산을 바라 보아도 그 웅장한, 조금도 시류에 흔들림이 없는 모습이 새삼스럽다. 그의 시 중에 "천석 무개의 종을 보게나. 크게 쳐야 걸맞은 소리를 내리니. 어떻게 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는 시가 있다. 가히 남명의 큼을 알려 주는 시다.  큰 종은 크게 쳐야 한다. 그래야 걸맞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이런 무게와 크기를 가진 선비가 있다면 세세한 잡사에 관심을 갖겠는가. 그래서 그는 처사요, 은사였다.나라에서 벼슬 자리를 내려도 그는 나가지 않았다. 그를 흠모하는 많은 선비들이 그의 문하에 찾아 들었다. 이들이 모여 뒷날 남명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그 대표적 면면들을 보면 오건, 하항, 정구, 정인홍, 최영경, 김우옹, 정온, 곽재우, 성여신 등등이다. 이들은 뒷날 각각 독립된 일가를 이룰 만한 인재들이었음은 누구나 알거니와 이들을 제자로 둔 남명 조식 선생이야말로 재야의 큰 어른이었다. 이들은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뒷날 임진왜란 때 결연히 분기하여 조국을 수호한 의병장이 되기도 했다. 남명의 의의 정신이 살아난 것이다. 또 역사의흐름에서 그들은 북인이라는 정치적 입장을 지닌 당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남명 정신의 핵심은 경(敬)과 의(義)이다. 경(敬)은 내면적인 위기지학의 핵심이고 의(義)는 외면적인 실천 윤리의 덕목이다. 경은 흔히 공경한다는 뜻인데, 상대를 공경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공경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가 수신이요, 치기며, 인격 수양이다. 이것이야말로 선비가 갖추어야 할 최고 목표임을 역설하였다.  경상 좌도에 퇴계 이황 선생이 있었다면 경상 우도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있었다. 하나같이 영남을 대표하는 큰 어른들이시다. 오늘날처럼 소인배가 득실거리는 때를 살면서 이 두 어른이 자꾸 생각나는 것은 무더위 탓만은 아니다. 참된 선비가 오늘날이라고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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