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述而不作(술이부작)-(23) 알안당, 또 하나의 울산부 동헌

조선후기 최초의 울산읍지 <학성지>(1749)의 관해조는 동헌을 내동헌과 외동헌으로 구분하고, 일학헌을 내동헌이라 했다. 그리고는 그 내력으로 김수오 부사의 창건, 그의 아들 김호 부사의 ‘일학헌’ 편액 사실을 서술했다. 이어 “외동헌은 3칸인데, 알안당(蘖岸堂)을 개축한 것이다. 손기양의 기문이 있다” 했다. 울산부의 동헌은 내동헌 일학헌과 함께 외동헌 알안당이 또 있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蘖’은 음이 ‘얼’인데, 울산에서는 ‘木’과 ‘卉’를 결합한 이체자로 쓰고(木卉) ‘알’로 읽어왔다.

선조 35년 울산판관이자 부사였던 손기양이 건립
알안, 모서리를 깎아 평평하게 한다는 뜻으로
윗분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용 취하겠다는 의지 표현
19세기초 세도정치·남징으로 유지·보수할 여력없어 폐기

◇울산판관 집무소 알안당

알안당은 선조 35년(1602)에 울산 판관(判官)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이 그의 집무소로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 직후 울산군을 울산부로 승격하면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하여금 울산부사를 겸하게 했는데, 판관은 그를 보좌하기 위해 파견한 정5품 문관이다. 병마절도사는 경상좌도의 군무를 총괄했으니, 판관은 사실상의 울산부사였다. 손기양은 판관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왜란으로 소실된 옛 수령의 집무소를 재건했던 것이다.  

 

그의 문집 <오한선생문집> 연보에, “선조 35년 울주판관으로 부임하여 알안당을 짓고 그 기문을 지었으니 ‘알안당기’라 했다”고 실려있다. ‘알안당기’는 <울산부선생안>에도 실려있다. 다음은 그 한 구절이다.

“내가 임인년(선조 35년) 봄에 통판(通判-판관의 이칭) 김택룡을 대신하여 울산에 부임하니, 고을이 잔폐하고 이지러졌는데, 다른 것은 말할 것 없고 업무 보는 청사가 좁고 누추하였다. 지붕에는 거적을 덮고 바닥에는 나무침상을 놓았으니 손님이 오면 땅에 앉고 비가 오면 업무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 까닭으로 태수는 아문에 나와 정사를 보는 일이 드물고, 아전이나 백성들은 수령 뵙는 일을 게을리 하여 정사는 졸렬해지고 백성들은 흩어졌다.”

이 좁고 누추한 청사는 왜란 이후 급조한 수령 집무소이다. 이제 왜란을 거친 고을의 백성을 안집하고 고을을 다스려야 하는 수령으로서는 새로운 집무소가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었다. ‘알안당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에 부로(父老)들과 의논하여 청사의 동북쪽 모퉁이에 땅을 얻어 돌계단을 놓고, 마루에 판자를 깔고 양쪽에 방을 설치했다. 띠풀로 지붕을 덮고 대나무로 울타리를 두르니 마치 처사의 집과 같았다.”

집무소의 이름을 ‘알안당’이라 한 것은 왜인가? ‘알’은 ‘깎는다’는 뜻이다. ‘岸’은 ‘모난 모서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알안’은 모난 모서리를 깎아 평평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나라 한유(韓愈)가 ‘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丞廳壁記)’에서 남전의 현승 최사립을 칭찬하여 “날카로운 서슬을 제거하여(蘖去牙角) 옛 자취를 따르고, 모난 언덕을 깨뜨려(破崖岸) 현승직에 충실했다” 한데서 따온 것이다.

◇왜 알안당인가?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판관이란 직임을 수행하면서, 윗사람의 명령에 순응하고 진퇴를 삼가해서 어긋남이 없는 것은 ‘윗사람을 섬기는데 알안’하는 것이고, 술마시기와 활쏘기를 숭상하면서 물흐르듯이 화합하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데 알안’하는 것이다. 알안당이란 편액은 그래서 합당하니, 걸어두기에는 부족할지 몰라도 ‘알안’으로 이름지은 의의는 있다 하겠다. 나의 후임자가 이 이름을 보고 뜻을 생각한다면 몇 칸 이 띠풀집이 다만 정사를 다스리는 청사만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알안당은 손기양이 당나라의 최사립처럼 고을을 다스림에 윗분과 백성들의 사이에서 중용을 취하면서 온화하게 임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건립한 것이다.

배대유는 광해군 2~3년(1610~1611)에 울산판관으로 재임했다. <울산부선생안>에 따르면, 울산으로 부임하는 길에 금교에서 손기양을 만나 그가 알안당을 짓고 기문을 지은 사실을 들었는데, 막상 부임해보니 건물은 이미 수년 전에 소실되고 기문도 전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가시덤불을 제거하여 알안당을 얽고, 기문을 지어 아름답게 꾸몄다.” 알안당을 재건했던 것이다. 이 기문도 <울산부선생안>에 실려있다.

그렇다면 <학성지>에서 말한 이 알안당을 개축해서 사용했다는 외동헌은 무엇인가? <울산부선생안> 이선원 부사 항에 “계해년(숙종 9년, 1683)에 도임했다. 외동헌을 중창했다”고 실려있다. 김수오 부사가 동헌 일학헌을 지은 3년 후의 일이다. <울산부읍지>(1871) 외동헌현판제영조에 이를 기리는 그의 시가 실려있다. “갑자년 봄에 아헌을 고쳐짓고, 앉아서 웃으며 미간을 편다네. 높은 산, 먼 내는 아름답게 늘어섰고, 좁고 작은 건물은 근민에 합당하네.(改構衙軒甲子春, 坐來便覺笑眉伸, 山溪遠敞堪排閱, 堂陛卑微合近民)”가 그것이다. 여기의 갑자년은 그가 부임한 이듬해인 숙종 10년(1684)이다.

이 시에서는 외동헌을 아헌(衙軒)이라 하고, 백성을 가까이 하기에(近民) 합당한 건물이라 했다. 이 건물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아헌은 관아라는 뜻이며, 근민은 수령이 백성을 가까이에서 보살핀다는 뜻이니, 그러므로 이 외동헌은 내동헌의 대칭이며 또 하나의 동헌이다. 영조조의 울산사림 박민효는 위 이선원 부사의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제목 ‘알안당’을 설명하여 울산의 ‘이아(貳衙)’라 했다. 이아는 두 번째 관아라는 뜻이니 동헌 다음의 관아라는 뜻이다. 또 하나의 동헌을 말한 것이다. 외동헌을 중창한 것은, 논고를 달리하여 언급했지만, 3년 전에 창건한 일학헌이 방 1칸, 마루 2칸에 불과하여 부사의 집무소로는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알안당의 퇴락과 소멸

조선 숙종~영조 때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군현별 지도 <여지도>의 ‘울산부지도’에는 학헌(鶴軒)과 아사(衙舍)가 따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의 학헌은 일학헌의 후신인 반학헌의 약칭으로 울산부의 동헌이다. 아사는 아헌과 같은 뜻으로 관아이며, 여기서는 알안당을 말한다. <학성지> 관해조에는, “내동헌은 3칸인데 곧 반학헌이며, 외동헌도 3칸인데 옛 알안당”이라 했다. 여기에 첨부된 지도에는 학헌과 알안당이 따로 그려져 있다. ‘울산부지도’의 아사가 알안당임을 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알안당은 동헌인 반학헌과 마찬가지로 울산부사의 집무소였다. 숙종 42~45년(1716~1719)에 재임한 울산부사 박만보는 외동헌 문루를 세웠다. <울산부선생안>에 따르면, 문루는 5칸인데 상층과 하층에 창고 4개를 두어 면포, 토지대장, 호적대장, 종이통 등을 보관했다 한다. 모두 수령의 업무 수행에 필수불가결한 문서와 물산이다. 알안당이 또 하나의 동헌임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정조조의 울산사림 이근오는 <죽오집>의 ‘알안당중수상량문’에서 “외동헌은 대소 빈객 접대를 위한 곳인데, 왜란 후 유우지당(攸芋之堂)으로 지은 것이다. 관아의 앞에 있어 정사를 듣는 자리로서 적합하다” 했다. 관아는 동헌이니, 알안당은 반학헌 앞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사를 듣는 자리라 했으니, 역시 수령의 집무소이다. 유우지당은 ‘군자들이 모이는 집’이라는 뜻이니, 앞의 빈객 접대를 위한 곳이라는 대목을 참작하면 울산부사의 집무소이면서 주로 내외의 빈객을 접대하는 장소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철종 9~11년(1858~1860) 울산부사를 재임한 이충익이 지은 ‘가학루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내가 부임할 때 처음 본 외동헌은… 곧 알안당인데, 허물어진 몇 칸 뿐이었다.… 알안당의 재목과 기와를 수습하여 가학루 중건에 보탰다.” 당시에 알안당은 폐기되어 있었고, 그 재목과 기와도 울산부의 외삼문 가학루 중건에 충당되어 영영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울산부읍지>(1894) 관해조에 “알안당은 외정당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한 기록이 이를 확인해 준다.

외동헌이 사라진 것은 19세기 초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중앙 정권 담당자들의 부패가 지방수령들의 남징으로 이어져 고을과 백성들이 이를 보수, 유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늘날 울산에서 알안당이라는 이름, 그것이 또 하나의 동헌이었음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글=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

그림= 최종국 한국미술협회 이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