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나의 것이고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래 나의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요(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 조)  처용이 돌아와 보니 그 지경이었다. 그러나 처용은 탓하지 않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처용가이다. 처용은 이름처럼 불륜의 처를 용서하였으니 처용(處容) 아닌 처용(妻容)이었나 보다.  요즘의 상식과 법에 비춰보면, 처용의 행태는 못나고 어리석은 남자요, 역신과 처용의 아내는 현장을 잡힌 셈으로 중동지방의 이슬람 방식대로라면 돌에 맞아 죽어야 했다. 비록 역신이 처용에게 역병을 피해 가는 것을 반대급부로 제공했지만, 처용에 대한 후대의 판단은 "관용과 용서와 화합"이라는 측면과 "어리석음과 무능함과 자포자기의 인간"사이에서 언제나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처음 용이 나온 곳에 있는 바위를 처용암(울산시 남구 황성동), 그 건너마을을 처용리라 했다. 사람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 된 보기이다.  왕의 둘레에 학들이 모인 곳을 학성동(鶴城洞)이라 하고, 구름이 걷혔던 그 곳 바닷가를 개운포(開雲浦), 또 왕이 분부해서 지은 절의 이름은 망해사(望海寺)라 하였다. 그것은 왕이 동해를 바라보며 용왕에게 용의 힘으로 왜병을 진압하고 뱃길의안전과 신라의 평화를 지켜달라고 빌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사적만 남아있다.  처용의 모습에 대해서 그의 이상야릇한 생김새와 유별난 의상으로 미루어 바다를 건너온 사라센 상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논리적 근거가 불확실하다. 처용무는 고려,조선으로 이어오면서 궁중행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식으로써 궁중무용으로 발전하였다.  처용암은 처용이 비로소 세상에 출현한 성지로서 신라국민의 호국용신 신앙의 발상지이다. 처용은 울산 사람들과 더불어 숨쉬어 왔다. 그는 춤의 명수요, 사람을 감동케 한 명가수였다. 마음이 넓은 덕인(德人)이자, 현실 적응력이 강한 사교적 정치가로서 능소능대한 능력을 소유한 신성한 사람이다. 인생을 한판의 승부로 보는 처용, 처용의 관용은 도덕을 떠나 있다. 삶의 여유에서 나온 것이다. 처용은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아온 인물이다.  처용정신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게 즐기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정신이라고 볼 때, 울산 사람들이 현대 축구팀의 응원단을 처용전사(處容戰士)라 이름한 것은 참으로 신통하고 적절한 것 같다.  울산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공업도시와 처용설화의 발상지를 떠올린다. 월드컵 같은국제행사를 통해 우리 울산의 독특한 처용설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선전하면 어떨까. 강길부 전건설교통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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