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풍요 갖춰주는 것만으로
아버지의 역할 다하는 것 아니야
자식의 정신 채우는 일이 가장 중요

▲ 김혜준 KACE 아버지다움연구소 소장

지난해 12월30일 저녁 귀갓길이었다. 택시기사가 라디오를 들으며 한마디 했다. “매일 뜨는 해를 보러 저렇게 몰려가다니…. 해는 내일도 그 다음날에도 또 뜨는데….” 이 말에 마음 속으로 무릎을 쳤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이 말씀이 한참 유행일 때에도 나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삼라만상은 무심하게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온갖 상상을 하면서 스스로 번뇌의 바다를 헤엄치게 된다’는 뜻이라고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분별심을 그토록 경계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번뇌에 이르는 상상이 곧 ‘나누고 구별하는 마음’(分別心)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一切唯心造)이고, ‘착각은 번뇌를 낳는다’는 가르침을 배웠던 저녁이었다.

위대한 택시기사 한분 더 소개해야겠다. 택시기사 바로 곁에 복잡하게 생긴 피리같은 물건이 눈에 띄었다. 클라리넷이라고 했다. 클라리넷! 이름만 들어도 ‘아! 고상하다’고 느끼는 촌스러움을 감추면서 “그걸 왜 가지고 다니시냐”고 물었다. 졸음을 쫓는 자신만의 비결이라는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손님을 기다릴 때나 졸릴 때마다 분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족한 연습량을 채울 수 있어 좋고, 졸음을 쫓을 수 있어 좋고…. 도무지 무료할 틈이 없단다. 한 때 기타를 배워보려고 잠깐 용을 썼었던 지라, 아무리 쉬워 보여도 악기 하나를 다루려면 일정량의 연습이 필요하고 그 과정은 그리 만만치 않음을 잘 안다. 하물며 저토록 폼나는 악기를 불어 제끼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연습이 따라야 할 것인가. 그런데 그런 인고의 과정을 일과 중에 꺼내드는 심심풀이 땅콩으로 치환시켜버리다니…. 세상에 이렇게 지혜로운 분이 또 있을까.

우리는 흔히들 무료한 시간을 보낼 때 ‘시간을 죽인다’(time killing)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노신사는 죽어가는 시간을 그렇게 살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오래오래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과연 ‘오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루에 몇 시간씩 ‘시간을 죽이면서’ 생물학적인 수명을 늘린다면 그것이 진정 ‘오래’ 사는 것일까. 남들이 손쉽게 죽이고 말았을 시간을 살려내는 이 사람이야말로 ‘사는’ 총량으로 치면 따라올 사람이 없는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런 깨달음과 교훈이 생길 때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내 딸이다. 내 자식에게 생존하는 그리고 슬기롭게 살아가는 기술과 지혜를 가르쳐주고 싶은 존재,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최근 부정(父情)을 다룬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 얼마 전의 ‘인터스텔라’가 그랬고, 지금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국제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참고로 ‘국제시장’의 영어 제목은 ‘내 아버지에게 부치는 시’(Ode to My Father)이다. ‘국제시장’에서 부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버지 덕수(황정민)를 비아냥거리는 아들딸들은 감동의 뒤 끝에 남는 안타까움이었다. 온 몸으로 가장의 책무를 다 했던 주인공이었지만 자식들을 정신적으로도 잘 키워내지 못했다는 뉘앙스가 남아서 그렇다.

사실 적잖은 아버지들이 자녀의 물질적 객관적 조건을 갖춰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자녀의 정신을 채우는 일은 엄마나 학교에 떠넘기고서 말이다. 딸에게 택시에서 배운 교훈을 전해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서로 시간을 내야 하고 작전도 짜야 하니, 귀찮은 일이다. 그러니 자식의 정신을 채워주는 건 가장 어려운 아버지의 숙제일지도 모른다. ‘마카데미아’라는 땅콩의 이름을 알게 해준 ‘아버지 조양호’를 봐도 그렇다.

김혜준 KACE 아버지다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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