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과 성악설. 인간을 보는 상반된 관점이다. 성선 혹은 성악의 관점에서 인간을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왜 사상가들은 그토록 집요하게 인성(人性)에 대한 관점을 수립하려고 하는 것인가.  인간 본성 혹은 잠재력의 윤리적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것이 성선설적 인간관이라 한다면, 그 반대의 입장이 성악설적 인간관이다. 성선을 믿고자 하는 이들은 인간 내면에 잠재한 고귀한 윤리적 능력 혹은 깨달음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무엇보다도 중시한다. 그러나 성선을 믿는다고 해도 현실의 인간이 충분히 윤리적이거나 깨달음을 드러내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당장 일상에서 겪는 현실의 인간들은 오히려 압도적으로 비윤리적이며 어리석다는 점도 인정한다. 기회만 있으면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 챙기고, 그 이기심을 위해서는 터무니없이 잔인하며 공격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선설은 저 넘쳐나는 비열한 이기적 충동, 위험한 무지의 이면에서 희미하게나마 깜박거리는 희망의 불빛을 소중하게 주목한다. 타인의 위험과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저급한 충동들을 제어하며 수준 높은 삶의 질서를 수립해 가려는 향상의 의지와 능력,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 계발의 힘이, 인간 생명에는 빛나는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음을 확신한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희망의 잠재력을 계발하여 극대화시키면, 이기심들이 날카롭게 부딪치던 세상은 비로소 살만한 곳으로 된다는 신념이다. 그래서 성선설은 교육과 수행을 중시한다. 성선의 인간관을 중시했던 동양의 지혜들은 그래서 수행의 노하우들이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다.  반면 성악설은 인간 존재의 윤리적 능력을 강하게 불신한다. 어차피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그들은 단언한다. 양심, 이타적 사랑과 헌신 등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요 위선일 뿐이라며 냉소한다. 어차피 이기적인 인간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얽혀 살아야 하는 세상. 이기심의 원색적 표현을 방치하면 결국에는 아무도 이기심을 충족시킬 수 없는 위험한 정글이 된다. 양심에 호소하지도 못하고, 이기심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악설의 해답은 법이고 계약이며 제도이다. 서로 충돌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규칙을 만들어, 위반할 때는 예외 없이 불이익이 돌아온다는 것을 몸에 배게 하면, 이기심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은 법과 규칙을 지키고 그 결과 세상은 안정된다는 것이다.  산업사회, 도시 사회가 도래한 이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성악설에 입각하여 사회 운영의 원리와 장치를 고안하고 가동해 왔다.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현실은 그렇게 "법대로 하자"는 사회이지 "양심에 호소한다"는 세상이 아니다. 이기심들을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조정하는 방식이 관심사이지, 이기심을 버리는 윤리적 능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법만 지키면, 규칙만 따르면, 더 이상 양심이나 인격을 문제삼지 않는 시대이다.  그런데 묘한 일이다. 한국 사회는 이기심들이 충돌할 때마다 "이기심" 자체를 비난하고 "양심"을 거론한다. 이기심들을 조정하는 과정이나 방식에만 몰두하지 않고 언제나 개인의 윤리적 능력까지 문제 삼는다. 우리 사회는 아직 사회운영의 성악적 원리에 무지한 것인가, 아니면 성악설적 사회 운영에 순응하지 못하는 그 어떤 "문화적 유전자"가 작동하는 것인가.  성선의 인간관은 존재를 풍요하게 하나 자칫 비현실적이고, 성악설은 매우 현실적이고 단기간에 효과적이나 근본적으로 공허하다. 두 관점은 그래서 절묘한 역학적 긴장과 상생의 어울림으로 만나야 한다. 오랜 성선의 문화적 유전자를 지녔을한국인들은 혹 그 "성선·성악의 상생적 종합"을 무의식적으로 지향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면 지나친 낙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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