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27대 선덕여왕 5년(636), 자장율사가 당나라로 들어가 7년간수학하는 가운데 산동반도에 있는 태화지(太和池)라는 못 가를 지날 때 홀연 신인(神人)이 나타나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세웠으니 덕은 있으나 위엄은 없는 고로 이웃나라가 도모하려는 것이니 빨리 돌아가 황룡사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의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열고 죄인들을 용서하면 왜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며, 다시 나를 위하여 경기(京畿 : 王都의 郊外) 남쪽에 한 절을 짓고 함께 나의복을 빌어준다면 나도 또한 보답하리라" 하고 말을 마치자 옥(玉)을 들어 바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자장율사는 귀국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으며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황룡사, 통도사 등 5대 적멸보궁과 태화사를 지어 계단(戒壇)과 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태화지 용(太和池龍:神人)이 청한대로 수도(당시:慶州)주변의 땅인 경기(京畿), 즉 울산에 세워진 절이 태화사(太和寺)이며 이 절 앞으로 흐르는 강을 太和江, 나루 이름도 태화나루(太和津), 마을 이름도 태화동(太和洞)이라 하였다. 그리고 태화지 용의 아들을 편안히 머물게 하였다는 지금의 태화교 위쪽의 속칭 용궁소(龍宮沼)를 황룡연(黃龍淵)이라 하였다.  이 황룡연 절벽위에 높이 솟아 있었던 태화루(太和樓)는 임진왜란때 불타버리고 서거정(徐居正)의 현액(懸額)은 이휴정(二休亭)에 걸려 있다. 태화루에는 노봉(老峯)김극기(金克己), 권근(權近), 서거정, 정포(鄭浦), 이곡(李穀), 김종직, 권상일, 윤지태 등의 많은 유명인들의 시(詩)가 전해온다.  이처럼 태화(太和)라는 이름은 신라가 태화지 용의 복을 빌면서 외적의 위협을 물리치고 장차 이웃나라를 병합 통일하려는 강한 의지가 서린 호국불교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태화강은 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조국근대화의 기수로서 새로운 민족사를 건설하려는 위대한 실험과 집념의 도전이 찬란하게 결실을 맺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태화강은 조상 대대로 친근한 모성의 젖줄로 포근한 정서를 안겨주는 우리들의 휴식처이며 보금자리였다. 유구한 세월 면면히 이어오던 이 강줄기를 따라 낭만과 정한(情恨), 환희와 비애를 담은 채 우리 울산인들의 가슴속에 도도히 흘러 왔다.  곳곳에 층층이 석양에 반짝이던 그 많던 모래톱과 은어, 뱀장어, 황어, 조개, 재첩이 모두 사라지고 생명 없는 강으로 변해버린 태화강, 우리 이 강을 다시 살리자. 태화루도 다시 짓고 황룡사 9층탑도 마저 올린 그 밤에 옛 선인들처럼 배라도 띄워 은어잡이 뱃놀이로 풍류를 즐기면서 시(詩)를 지어 구름에 새기고 달에 써서 남길거나. 전 건설교통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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