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를 쓰고 아이들 기 살리다 보니
이젠 부모가 자식 눈치 보는 시대
감싸는 게 부모 노릇 전부는 아냐

▲ 김혜준 함께하는 아버지들 대표

필자는 어릴 때 말하자면 좀 까졌었다. 국제영화제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부산의 남포동 극장가를 중2 때부터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 말이다. 당시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모님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영화를 보러 다닐 수 있었다. 남포동까지 가는 좌석버스 맨 뒷좌석에서 단짝 친구와 함께 때때로 맛도 모르는 캔 맥주까지 홀짝거리며 똥폼을 잡았었다. 그 남포동에는 신천지 백화점이 있었고 그 지하에는 롤러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들이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에서 재연되었다. 유오성과 장동건이 열연했던 이 영화에는 명 대사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니가 가라. 하와이!”이다. 어렵사리 폭력조직을 재건한 보스 유오성이 라이벌 조직의 넘버 투 장동건을 불러서, 잘못하면 자기가 친구인 장동건을 제거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며, 하와이로 잠시 몸을 피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장동건은 침을 내뱉듯 말한다. “니가 가라. 하와이!” 더 이상 유오성의 ‘시다바리’가 아니라는 거다.

이 대목에서 곽경택 감독의 선견지명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수많은 아버지들이 선망하고 있는 ‘친구’같은 아버지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예견했기 때문이다. 내 딸이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딸에게 심부름이라도 시키려면 머릿속에서 여러 차례 예행연습을 해봐야 했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은 벼슬이며 특히 고3은 상전중의 상전이 아니던가. 학교공부에 바쁘신 딸이 거부하면 어떻게 할까 내심 걱정하면서 방청소, 이부자리 정리, 욕실정리, 설거지 등에 대해 지적하곤 했다. 집안의 대소사가 모두 아이 중심으로 짜여진 상황에서, 집안 서열 1위인 딸은 소심한 아버지의 심리상태를 꿰뚫어 봤을 것이다. 딸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표정은 ‘그걸 왜 나에게 시켜요? 아빠가 좀 하지…’라고 외치고 있었다.

‘친구’같은 아빠는 딸의 “니가 가라. 하와이!”에 당황한다. ‘이걸 불러 앉혀놓고 한차례 훈계를 해 말어?’ 하지만 대입이라는 절체절명의 대업 앞에서 가정교육은 번번이 무릎을 꿇고 만다.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드디어 딸이 대입시험을 마쳤다. 나는 딸을 불러서 말했다. 그동안 미뤄왔던 훈계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적지 않은 저항이 있었다. 애 엄마도 딸의 역성을 든다. 하지만 밀어부쳤다. 더 이상 미루다가는 영영 가정교육의 기회를 놓치게 되겠기에 말이다. 이 글을 내 딸이 본다면 어이없어 할지 모른다. ‘아니 지금까지 늘어놓았던 그 무수한 잔소리는 훈계가 아니고 무엇이었단 말인가?’라고. ‘하지만 이 녀석아! 그게 그런 게 아니란다. 너는 아직도 한 참 멀었어!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뭘 그런 걸 애를 시켜? 당신이 좀 갔다 와. 부모가 돼 가지고·” ‘어디 감히 귀하디 귀한 자식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킨단 말인가? 잘 커주는 것만 해도 어디인데…!’ 아닌 게 아니라 자녀들에게 심부름시키는 게 예전같지 않다. 우리 어릴 적에야 아버지 어머니 심부름 가는 건 그야말로 일도 아니었다. ‘뭐 시키실 거 없나요?’라며 언제든 스탠바이 상태였다. 그러니 이웃 어른들도 남의 집 아이들에게 곧잘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요즘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왜 그럴까? 우선 요새 애들은 어른들 못지않게 바쁘다. 바빠서 심부름시키기가 미안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덜 만만해졌다. 왠만한 어른들 뺨치게 영악해진 데다가 부모들이 아이들을 워낙 떠받들고 살다보니 아이들의 자의식이 강해졌다. 이게 다 부모들이 기를 쓰고 아이들 기를 살리려고 하는 탓이다.

박완서는 소설 <휘청거리는 오후>에서 “옛날 어른들처럼 스스로의 생각에 자신이 없이, 그저 자식들 눈치나 살피고 있다. 왜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싫은 내색을 못하나? 도덕이란 규범이란 아버지노릇이란 권위란 이해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이거 우리 부모들이 잘하고 있는 걸까?

김혜준 함께하는 아버지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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