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면 우리는 살기 위하여 희망을 가져야 한다.  어려웠던 수렵·농경사회를 지나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인류에게는 일약 무한한 진보라는 위대한 약속이 기대되었다. 기술의 발달로 자연을 다스리게 되었고 대량생산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과 개인적 자유가 보장되는듯하였다.  그러나 빛보다는 그늘이 더 크게 드리워진 현실이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생태학적 파괴로 자연의 균형이 깨지고 생명 존엄성의 혼란과 사회가 복잡,전문, 다양화되면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톱니바퀴 신세가 되었으니 그렇게원했던 복리와 행복은 오히려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된 지 오래되었다.  황금물결로 양심과 도덕은 물론 다감한 인정도 송두리째 삼켜버리고 건강과 목숨까지도 담보로 잡혀야 할 지경이다. 현대인의 자산이라는 동력기관과 전자제품 위력에 압도되어 자신의 처지도 망각하니 행복은 점점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 수록 목이 마르듯 우리는 소유하면 할수록 부족함을 느끼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다른 소유를 불러일으키니 어디가서 안정을 찾아야 될까. 우리 한국인은 절대권력에 복종도 하지만 평등의식이 강하다고 한다. 남들이 가지면 나도 가져야 하고 내가 하면 남들도 따라한다.  대열에 처지면 능력없는 남편, 열등인간으로 폄하되니 과욕과 허세를 부리거나 혹은 의기소침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혀 다른 돌출구를 모색하게 된다.  모든 사람의 탐욕을 태우고 균등히 나누기에는 떡이 너무나 모자란다. 성경에는 많아서 교만하지 말고 없어서 비굴하지 말라고 하였다. 행복이 머무르기에는 적당한 햇빛과 양분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재산이 많아서 만족하였던 사람보다도 오히려 불행하였던 사람을 더 많이 보았던 것같다. 소유하려고만 하였지 나누면 기쁨이 두배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난화분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에는 선물 받은 난이 사랑스러웠으나 시간이 갈수록 마음의 평화를 잃게 되었다. 혹시 시들거나 죽지는 않을까하는 등 여러가지 걱정에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 후에야 속박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행복을 찾았다는 것이다.  외국에 가면 자주 외국인 가정을 방문하는 편이다. 미국을 제외하면 일본이나 유럽가정이 우리보다 잘 산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높게 보고된 바 있다.  사회 구석구석에 쌓아놓은 공동의 재산인 역사, 문화와 환경이 그들을 풍요롭게 한다. 우리나라는 산업과 상업활동은 세계 수준이지만 정신·문화적 배경은 아직까지바닥이다.  공동체의식의 결여는 공동재산 소유와 나눔에 무척이나 인색하여 개인이 다 가지려고 하니 능력도 모자랄 뿐만 아니라 항상 부족함에 불만이다. 행복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단의 노예가 되어 주저앉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민은 의식주 불편없는 화목한 가정과 교육, 교통, 환경 등 안정된 사회생활을 원한다. 일한 만큼 보답받고 노후복지만 보장된다면 무얼 더 욕심내겠는가? 사회와 국가가 쓸데없는 거대한 이슈로 순박한 국민의 마음을 너무 흔들어놓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탐욕을 줄일 수록 희망이 다가오고 희망이 보일 수록 삶이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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