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述而不作(술이부작)
(29) 울산 경상좌병영 이설론

 

울산은 조선 태종 17년(1417) 경주 동면에서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의 본영이 옮겨오면서 군사기지가 되었다. 병마도절제사는 육군사령관인데, 후일 병마절도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병마절도사는 좌병사 또는 병사라 부르고, 그 본영은 좌병영 또는 병영이라 불렀다. 이로써 울산에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500여명 군사가 상주하게 되었다.

세조 5년(1459)에는 동래 부산포에 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울산 개운포에 옮겨왔다. 역시 좌수사, 수사 그리고 좌수영, 수영이라 불렀다. 이로써 울산은 병영과 수영이 병존하는 거대한 군사기지가 되었다. 여기에 이렇듯 두 군영을 배치한 것은 신라 이래, 특히 고려말∼조선초에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1417년 울산 옮긴 후 성종代 서거정이 병영 이설 최초로 논의
최전선 위치 임진왜란 중 왜구 내륙관통 저지 못한 약점 확인
정조代 울산 사림 이준민·경상좌병사 백동준 경주 이설 주장
1902년 진위대 병력 경주 떠날때까지 485년간 군사기지 담당

◇ 한 고을 두 군영의 폐단

울산에 병영과 수영이 함께 설치된 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는 병영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최초의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성종 13년(1482) 경연지사 서거정(徐居正)은 병영을 이설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 울산은 작은 고을인데 병영과 수영이 모두 경내에 있어 고을이 잔약해진다. 둘째, 두 대장이 한 곳에 있으면, 적변이 있을 경우 서로 구원할 수 없다.”

고을이 잔약해진다는 것은 병영과 수영이라는 두 관부에게 백성들이 공식, 비공식의 지공(支供, 접대)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고을의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다. 적변이 있을 경우 서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은 병영과 수영이 가까이 있어 양쪽이 동시에 공격당하면 한 쪽이 다른 쪽의 위험을 구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병영을 이설하자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너무 해안에 치우쳐 있어 내륙방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병영은 왜인이 거주하는 염포에서 뱃길로 10여 리, 육로로 20여 리 단거리에 있었다. 성종 6년(1475)의 기록에, 염포 영성에는 왜인 가호 34호가 있고, 인구는 128명이나 되었다. 저들은 병마절도사의 능력과 군정(軍政)의 허실을 훤하게 파악하고 있어, “10여 명이 칼을 짚고 성을 넘으면 절도사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공언하는 형세였다. 염포의 왜인들은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삼포왜란으로 일본으로 쫓겨갔지만, 이것이 병영을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논거가 될 수는 없었다.

한편 울산의 수영은 중종 말년에 동래의 부산포로 옮겨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옮겼다고 알려졌지만, <울산광역시사>(2002) 역사편에 따르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어도 이보다 50여 년 전에 옮겨갔다고 밝혀져 있다. 사료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서거정이 말한 병영을 옮겨야 할 두 가지 이유를 적용했을 것이다.

이로써 울산은 염포 왜인의 위협과 수영에 대한 지공의 부담을 일단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병영은 여전히 존속하여 울산 백성의 부담이 되고 있었다. 이 병영은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교육환경을 조성하였다. 무장한 군인과 저들의 훈련을 일상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맹모삼천(孟母三遷) 고사가 있지 아니한가.

◇ 좌병사 백동준의 병영 이설론

병영 이설론은 성종조에 잠시 논의되었다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제기되었다. 그 논거는 왜란 당시 적군이 상륙하여 무인지경으로 내륙을 관통한 것은 울산의 병영과 동래의 수영이 최전선에 있다가 한꺼번에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해안의 병영을 내륙으로 옮겨야만 할 것이었다.

이준민(李俊民, 1736∼1799)은 18세기 후반 울산 사림이다. 본관 학성, 호 학고(鶴皐)이다. 충숙공 이예의 후손이며, 의병장 이인상의 5대손이다. 영조 47년(1771)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의 문집 <학고유집>에는 경상좌병사 백동준(白東俊)을 대신해서 국왕에게 올린 ‘경상좌병영 이설을 청하는 장계, 병사를 대신하여(請移慶尙左兵營啓, 代兵使)’가 실려있다. ‘병사를 대신해서 지었다’고 표기되어 있는데, 여기의 병사는 경상좌병사 백동준이다. 그는 함경남도 병사로 있다가 정조 2년(1778) 1월 경상좌병사 김영수와 교체되어 울산에 내려왔다. 문장력이 부족한 무장의 문인에 대한 글 청탁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의 병영 이설론 요지는 이러하다. 군사제도의 요체는 중앙에 자리잡은 장수가 좌우의 군사를 통제해야 하는데,(居中控制左右, 거중공제좌우) 울산 병영은 너무 남쪽의 왼쪽 끝자락에 치우쳐 있다. 그나마 밖으로는 병영성이 바다에 닿는 산자락에 자리잡아 험악한 지세를 이루지 못하고, 안으로는 농성할 때 군사들이 사용할 우물이 없다.

또한 병사가 거느리는 3진(鎭)의 군사는 멀면 3, 4백 리 밖에 있고, 가까워도 3일이 더 걸리는 거리에 있다. 이에 반해 왜적의 소굴 대마도는 병영에서 바라보이는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므로 만약 변란이 일어나면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왜선이 병영성 아래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는 병영 이설에 필요한 경비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했다. 30여년 전 경상도관찰사 남태량이 이설에 소요되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축성곡(築城穀)을 비축하여 도내에 배포했는데, 그것이 오늘에 이르러 수만 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남태량은 영조 22년(1746) 11월 대사간에서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서 청렴하고 강직해서 영남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다는 인물이다. 그런 만큼 그의 노력은 병영 이설이 당대 경상도의 현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병영 이설의 적지로 경주·영천·신녕이 꼽히고 있었는데 백동준은 경주를 최적지로 꼽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경주는 신라 이래 큰 고을인 데다, 땅이 넓고 군사가 많다. 게다가 바다가 가까워 해방(海防)도 쉬운데다 수군의 후원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공격과 수비에 적합하고, 중앙에서 좌우를 통제할 수 있으며, 아침에 명령하면 저녁에 출동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거중공제좌우’의 묘를 얻은 곳이다.”

◇ 이설 실패, 고착된 무향

백동준은 정조 3년(1779) 4월에 이 장계를 올렸다. 남태량 관찰사가 비축한 축성곡 수만 석이 5만석으로 바뀌어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이준민이 대신해서 지은 장계와 동일하다. 백동준이 약간의 첨삭을 가했을 것이다.

이 장계를 두고 영의정 김상철은 국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상좌도의 병영을 울산에 둔 것은 호남의 병영을 강진에 둔 것과 똑같습니다. 병영을 중앙 육지에 두지 않고 바닷가에 둔 것이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오늘 이를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병영이 해안에 있지만 옮길 수 없다는 것이다. 국왕도 이렇게 호응했다. “옛 사람이 바닷가에 병영을 설치한 것은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 문제는 내버려 두어라.”

바닷가에 육군의 본영을 설치한 잘못된 국정을 36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옛 사람들이 까닭이 있어서 그리했을 것이니 거론하지 말라”는, 국왕과 영의정의 황당한 대응이었다. 이른바 개혁군주라 일컫는 정조조의 일이다. 조선시대판 최고위 공직자의 복지부동이다.  

 

이후에도 병영 이설 논의가 더러 있었으나 끝내 이행되지 않았다. 정조 사망 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보수파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으니 이제는 가망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병영은 일본의 입김이 작용했던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혁파되었다. 그러나 다시 대한제국의 군제개편으로 대구에 있는 진위대 제3연대의 제3대대 병력 500여 명이 옛 병영에 주둔했다. 이 제3대대가 1902년에 경주로 옮겨가면서 울산의 군사기지는 비로소 종식되었다. 설치된지 무려 485년 만이었다.

이렇듯 사실상 조선왕조 전기간에 걸쳐 존속한 경상좌병영은, 여러 번 지적했지만, 울산의 특성을 무향(武鄕)으로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오늘까지 고명한 학자, 청백한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하고, 험악한 우격다짐과 엽기적인 범죄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제 500년 무향의 전통을 환골탈태하는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글=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

그림= 최종국 한국미술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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