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한다는 것은 본래 경제적 행위이다. 이것도 갖고 저것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데서 모든 고민은 출발한다.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때의 비용을 기회비용이라고 한다. "기회비용이 얼마인데"라는 말은 무언가를 하는 일의 최소한의 대가를 말하는 것이다.  작금 우리는 6·25를 상기하면서 6·15의 1주년을 생각한다. 6·25가 무엇인가. 50년 전의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닌가. 아!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제6·25 보다 6.15를 소중히 해야하는 세월을 맞이하였다. 어느 것이나 남북한간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곧 남북한간이 적이냐 동지이냐를 가르는 난제가 되었다. 현재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6·15 와 6·25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흔히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고 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바뀌고, 어제의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변모하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적을 동지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그리고 오늘의 동지가 영원한 동지로 남을 수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손가.  그러나 적과 동지의 관계가 뒤바뀔 수 있다고 한다면, 언제까지라도 안심하고 동지적 관계를 맺어간다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렇다면, 남북한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까. 어디 우리가 남인가. 남이 아니라면, 우리관계는 영원한 동지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이런 당위적 논리에서 볼 때, 우리는 6·25 보다는 6·15를 더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난 50년 동안 6·25를 상기해 오던 우리 사회가 하루아침에 6·15의 분위기로 돌변할 수 있을까. 도대체 6·15 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단지 남북한 최고 지도자의 만남이 분단의 벽을 허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더라도 남북한 정상회담이 분단 반세기만에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 민족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말할수 있다. 그 후속 조치가 속시원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천리 길도 첫걸음부터라는 말처럼 머나 먼 통일의 길에 디딤판을 놓았다는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북한의 태도를 보면, 남북한 합의준수라든가 상호주의라든가 국제법적 원칙준수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는 것 같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투정을 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껏 잘 지켜오던 북방한계선과 남한의 영해를 무단 침범하는 등 생트집을 잡아 심기를 건드리는 행위는 다름이 아니고 6·15의 대가요구의 간접적 의사표시인 것이다. 손을 내밀지 않아도 식량이나비료, 의약품 또 금강산사업을 통한 달러지원을 지속적으로 해 주고, 또 앞으로는 전력과 컴퓨터분야에서 무상지원을 과감히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건의 성숙이 곧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암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참으로 6·15를 소중히 하면 할수록 이를 충족시키는 조건은 산처럼 높이 쌓여져 갈 것으로 보인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든가. 남이 아니라는 조건에서 일방적으로 경제지원을 요구할 때, 그 당혹감을 어떻게 소화해 낼 수 있을까.  북한으로서는 체제도 지키고 경제도 살리고 하면서 일석이조의 성과를 얻고 싶을 것이다. 앞으로 북한은 때만 되면 6·15를 들먹거릴 것이 뻔하다. 이제는 6·25 행사도 대대적으로 벌릴 수 없게 되었다. 저쪽이 무슨 트집을 접고 6·15의 분위기를망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 6·15냐 6·25냐를 선택하는 데는 어느 쪽 기회비용이 크냐 적으냐 그것이 문제로다. 6·25를 맞이하여 이 숙제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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